2018년 2월 23일 금요일
강원비엔날레 참관
큐레이터가 모든 것을 잘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대충은 알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강원비엔날레는 전체 조율에서 실패한 전시였다. 비어있는 곳에 작품을 놓는다, 나아가 기획자가 생각했을 때 좋은 작가에게 좋은 자리를 준다 정도의 생각을 했던 거 아닌가 한다.
"악의 사전"이라고 하는 표제를 통해 비집고 흘러 들어오는 감독의 의식은 불쾌하다. 정의와 악을 추상적으로 양분하고 자신과 작가를 정의의 자리에 둔다는 식의.
아이고...
2018년 2월 19일 월요일
2018년 2월 9일 금요일
from Christine Mehring, Television Art's Abstract Starts: Europe circa 1944-1969, October (125), Summer 2, 2008
모든 과거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와는 다르게,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우선적으로, 우선적으로 컨텐츠를 정의하지 않거나 거의 하지 않은 채로, 추상적 프로세스로서 전송하고 수용하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이다. 컨텐츠에 관한 질문이 부상했을 때, 그것은 해소됐다, 대체로, 의존적으로parasitically. . . . 그것은 수요에 우선하는 방송 시설의 보급인 것만이 아니었다. 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은 컨텐츠에 우선했던 것이었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 텔레비전 (p. 29)
It was made by artists who primarily worked nonfiguratively in other media and who used the new medium to produce abstract images of a self-reflexive nature. Modernist artists and critics routinely posited abstraction as the culmination of a process of reduction of long-established media like painting and sculpture to their essence. By contrast, the pioneering television artists turned to already-established abstraction in a foundational gesture of isolating the medium's essence to open up yet unknown possibilities. The implications of this are twofold. For one, the essential qualities they turned up paradoxically mapped onto preexisting concerns that had emerged from their work in more traditional media. (p. 30)
It was made by artists who primarily worked nonfiguratively in other media and who used the new medium to produce abstract images of a self-reflexive nature. Modernist artists and critics routinely posited abstraction as the culmination of a process of reduction of long-established media like painting and sculpture to their essence. By contrast, the pioneering television artists turned to already-established abstraction in a foundational gesture of isolating the medium's essence to open up yet unknown possibilities. The implications of this are twofold. For one, the essential qualities they turned up paradoxically mapped onto preexisting concerns that had emerged from their work in more traditional media. (p. 30)
2018년 2월 8일 목요일
2018년 2월 7일 수요일
개인에 관한
요즘 벌어지고 있는 문제, 성폭력과 갑질,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다수의 방조 같은 문제를 구조의 탓으로만 보는 데 동의할 수 없다.
구조 탓을 하는 데는 하나 부동의 전제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위주체가 권력 구조 하에서 발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권력은 관계 안에서 상대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하위주체는 누군가에게 권력일수도 있다. 이 사실은 중요한데 하위주체가 영원히 하위주체로만 고정되지 않는다는 존재론적 상황에 관해 힌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권력도, 하위주체도 아닌 상태로 끊임 없이 변화하는 중간 영역은 포착하기 까다로운 대상이다. 그럼에도 규정하자면 아무 것도 안하길 자기 스스로, 그러니까 주체적으로 선택한 주체다. 아마도 세상이 별볼일 없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깨우친 것이 이유 아닐까 싶다. 마치 쇼펜하우어처럼 세상은 살기 위한 의지로 가득 차있다는, 그러니까 이 위험한 세계에서 생존이 인생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그래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그러니까 회색지대의 이들은 책임을 짊어지길 기꺼이 거부하는 것을 선택한 자다. 전체주의가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게 만든다면 역으로 이들은 개인을 위해 전체를 희생한달까. 전체주의적 개인주의? 그런 측면에 엄연히 존재하며, 이것은 소수가 아니라 대다수의 회색지대의 멘털리티인 것 같다. 이들이 구조 안에 가득차 있는 한, 최종 책임자만 날리거나 정권을 교체하거나 구조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을 일삼는 것은 정말로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회색지대의 사람들은 어떤 때는 동의하고 어떤 때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살아 남을 것이고 그들은 여전히 지나간, 그리고 또 다시 생겨나는 새로운 권력에 책임을 떠 넘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는 변한다. 그것도 이따금씩은 수동적이겠지만 이따금은 능동적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아직 우리는 이른바 생성적 구조라는 걸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구조는 같은 것을 반복 재생산하기 마련이며, 여기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것도 결국 인간의 선택이다. 그것도 어떤 순간순간의 개인이다. 모든 사안에서 이 개인을 드러내게 만들고 그들에게 책임성을 씌우고 상벌을 적절하게 마련하는 것이 갑질 문제의 해결이라고 한다면 너무 추상적이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특히나 전체주의를 개인의 이기를 위해 취사선택하는 그런 희안한 이데올로기를 깨는 데에는 그것만큼 특효약이 없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