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2일 월요일

(Re)presentation = ?

재현은 언제나 뒤늦게 온다. 그것은 후위에 선 지식인의 태도와 닮았다. 모든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그것이 어떻고 저떻다 그제서야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어난 일에 덧붙은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

엇나간 재현, 소위 알레고리적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 일반적인 것이었다. 일어난 일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다르게 해석하면 이미 일어난 일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론이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타임머신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이 타임머신만 탄다면, 어떤 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꽤나 순진하면서도 오만한 생각이었다. 제 머릿속 안에서 일어나는 망상 혁명일 수도 있다는 걸...

모더니스트는 재현에 저항했다. 하지만 불충분했다. 그들이 한 것이란 단지 형상에 저항했을뿐, 더욱 충실하게 제 마음을 재현하려 했다. 그들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감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천재라는 관념이 탄생한다. 예술의 섭리=제 자신 자체인 인간이 요청되어야만 재현하지 않는다가 성립한다. 물론 그건 웃긴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미술의 장치에서 재현을 그만두면 무엇이 남을까? 극단적인 견지에선 작품 자체가 탄생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관객뿐이다. 오직 관객만이 암묵지에서 뚜렷하게 현전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3월 9일 금요일

조민기 자살

충격적이다. 이걸로 확실해진 것은 성폭력 가해자-남근주의와 미투운동가 사이는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라는 사실이다. 미투운동이 혁명이라면 그건 현대적 버전의 유혈혁명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회가 아직까지 야만의 시대라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2018년 3월 8일 목요일

서동진과 권명아

간밤에 서동진 선생이 글을 올렸다. "미투 운동은 견제되어야 한다." 상당히 마르크시즘적 원론이었고 어느정도 통쾌함이 있었다. 내 생각의 60퍼센트 이상은 아마 서동진의 글을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을 퍼나르는, 내가 평소에 혐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미술계 남근을 보고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글의 의도와는 다른 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글쓴이의 잘못일까? 아니면 퍼나르는 인간들의 잘못일까? 둘 다의 잘못일까? 어쨌거나 이런 상황과 문맥은 뭐가 뒤틀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명아 선생의 페북 포스팅을 봤다. 서동진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문맥상 대상이 서동진임은 분명해 보였다.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길, 말을 아끼시기를." 이 말은 서동진의 언급이 반동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서동진에게 미투 운동이 인권을 무너뜨리는 반동일 수 있듯이 권명아에게 서동진의 마르크시즘은 현재의 운동성을 반감시키는 반동일 수 있다. 바꿔말하면 이런 것이다. 권명아에게 미투는 인간이기 위해서 발언하는 것이라면 서동진에게 미투는 인간임을 무시/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임을 지키려는 남성과 인간임을 주장하는 비인간 여성.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하지만 그 복잡성에 비해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이 둘은 모두 당사자 자신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후원자이며 무언가를 생산하는 위치에서 사실은 멀다. 그들은 언제나 변화보다 느리게 반응할 것이며 그때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이에 그 사태는 이미 사라져 없을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나는 미투 운동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생성하는 미투로서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것은 권명아나 서동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나는 그걸 어찌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이것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존경한다. 단, 파시즘으로 향할 가능성이 있는 미투를 좀 더 생산적으로 생성하기 위해서 서동진의 우려는 (부정이 아닌) 긍정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혁명은 그럴 때 마르크시즘으로부터 시작해 페미니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으로부터 시작해 마르크시즘으로 가는 길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2018년 3월 5일 월요일

속물적 페미니즘

http://www.hankookilbo.com/m/v/0fc875dc8b5b4541956f82248199504d

"-페미니즘이 왜 중요한가. 
김=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죠. 여성 인력들이 결혼과 출산으로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될까 두려워한다면 아이를 가지려 하겠어요? 이렇게 계속 인구가 줄면 국가의 중요한 자원인 청년 자원도 줄겠죠. 그럼 당장의 경제 활력은 물론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시간 문제에요. 그러니까 이걸 해결하려면 양성 평등이 전제돼야 합니다. 여자들이 일자리를 갖기 쉬워야 하고, 일을 하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 낳아 키우는 게 당연한 일이 돼야 해요."

페북에서 박권일이 이 말을 두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여성을 애 낳는 기계로 보는 인간이 어떻게 페미니스트냐고. 외려 나는 왜 이 문제가 여성에게 중요하지 않은지, 나아가 사회에 중요하지 않은지 궁금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여성의 다양한 정체성 중 한 측면은 출산기계가 맞다. 표현이 과도하지만 이것만큼 그 의미를 잘 표현해주는 말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출산기계로서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국가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하다면 그것에 관해 지원/보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것을 주장하고 국가와 여성이 협상하는 것은 당연한 사회적 과정이고 진보다. 엄마로서의 여성이나 직장인으로서의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여성의 인권을 이해하는 것과 배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성 인권을 실현화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박권일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김이란 사람이 이야기하는 유물론적 토대보다 사상검증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단순히 너의 진정성은 부족해서 내가 보기에 불편하다고 투정하는 오만한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고 느끼는 쾌감이 상당하신가보다.ㅎ 우리나라 지식인은 가만히 보면 조금만 속물적인 것이 문제다. 그 애매한 위치가 오히려 진보를 가로막는다는 생각은 그들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생산자로서의 비평가

비평가는 뭘 하는 인간일까? 보통은 칼과 저울을 들고 작품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는 생산자를 지향하는 룸펜 혹은 아나키스트이겠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나 또한 대부분 이런 포지션에서 작품을 보아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위치란 벤야민이 말하듯이 계급과 계급 사이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자리다. 안민욱이 내가 남에 대해선 쉽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을 한 것을 돌이켜보면 이런 오만한 나의 위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생산의 입장에서 비평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비평가가 하늘이 아니라 땅 위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진보적 생산자라면 분명히 당대 생산구조 속에서 내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고 어떻게 그런 기능이 수행되고 있으며 그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생산자로서의 저자에서 나오는 저자-부르주아-전문가-엔지니어의 모델이다. 내 식대로 이해하자면, 혁명을 위한 비평가의 기능성 중 가장 효율 좋은 것은 일종의 스파잉이다. 부르주아의 생산도구에 기생할 수밖에 없지만 이내 그것을 배신한다. 이 스파이는 부르주아의 생산도구를 프롤레탈리아트의 혁명 도구를 향해 진보하게 하는 기술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르주아적 전문가는 최상의 엔지니어가 된다. 

진보적 생산자로서의 비평가가 해야할 일은 그래서 프롤레탈리아트-작가와의 정신적 연대 같은 것이 아니다. 프롤레탈리아트와 동질화하려는 노력도, 어찌보면 부르주아와 거리를 두려는 노력도 무의미하다. 저자의 자리가 그런 자리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부르주아의 생산도구를 혁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도구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르주아 내부 진영에서의 구조적 투쟁이자 부르주아 외부 진영에서의 구조적 투쟁이다. 이로서 비평가는 이데올로기 후원자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때의 비평은 어쩌면, 아직은 이름 없는 기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벤야민이 주는 통찰은 간단하다. 글쓰기는 비평의 이름을 벗어 던지고 당대 생산관계를 뒤바꾸는 혁명을 위한 도구가 될 필요가 있다. 안민욱은 확대해서 말하자면 비평가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도구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무의식중에 내비쳤다. 그리고 오늘의 비평가는 일정부분 그런 식으로 주류 생산관계 속에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나는 그런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들과 거리를 두고 불가능한 자리에 서서 작가를 나무랐다. 하지만 벤야민에 비추어보자면 나는 결과적으로 그런식으로 비평의 권능을 재확인했거나, 혹은 어딘가에 있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 후원자가 되었다. 물론 그들이 잘한 건 아니지만 나 또한 이런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그 혁명적 도구성을 획득하기 위해 비평은 어떤 기술을 발전시켜야 할까. 이건 글쓰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에 어렵다. 

2018년 3월 4일 일요일

한나 아렌트

왓차플레이에서 감상했다. 다른 것보다 책으로만 본 지식인의 육신이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광경이랄까? 이런 걸 보는 건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비록 영화이지만. 거기서 아렌트는 밥도 먹고 연애도 하고 까이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하고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고 그러더라. 그러니까 그냥 사람이더라. 그리곤 우리나라에서 칼럼을 쓰고 비평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 또한 아렌트만큼 존경할만한 분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