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비엔날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미술인만을 위한 축제로 남아 왔는데, 큰 이유는 일반 미술 관객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디서도 현대미술을 독해할 수 있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자체는 비엔날레라는 소재를 포기하지 않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행정 관료들이 미술을 심지어 그들이 지원하는 대상임에도 제대로 경험도 해보지 않기 때문에, 그냥 전시장에 가서 쉽게 그림을 본다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관료들이 미술을 향해 끊임없이 지원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다. 제도를 탄탄하게 만들면 수요가 자동으로 생길 것이라는. 그래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축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광주비엔날레는 이제 20년쯤 됐을 거다. 광주시민은 그래서 심지어 택시 운전기사라도 현대미술이란 말에 친숙하다. 하지만 이게 자랑할 거리인가? 20년간 퍼부은 돈의 성과가 단지 친밀함 수준에 그친다니.
비엔날레는 그래서 미술인을 위한 지원제도 중 하나로 전락했다. 그렇게 비엔날레는 일말의 자율성을 획득한다. 사회와 동떨어진 장소에서 예술 관계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축제를 세금을 써가며 즐긴다. 그것을 모르는 자는 관료뿐이다. 미술인은 비엔날레라는 파이를 난도질해 사유화한다. 유망한 큐레이터와 디렉터라면 비엔날레는 거쳐가야하는 코스이며. 작가도 마찬가지다. 비엔날레는 인증절차 중 하나다. 더 큰 상징자본으로 향하는 몇개 없는 통행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특권적인 장소가 문제인 이유는 거기에 아무런 크리티컬한 비판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크리티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예술 내부로부터 솟아난 비판이 아니라 예술 바깥으로부터 온 비판을 이야기한다. 사회의 영역에서는 미술에 무지하고 미술은 사회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기껏해야 사회로부터 온 비판은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고 예산타령만 한다. 미술에서는 거창하게 사회와 지구의 운명에 관해 걱정하지만 자기들만 기특하게 생각하는 언어로 그렇게 한다.
비엔날레가 회차마다 추구하는 것은 시의적절성이다. 한국은 고유한 예술이론이 부족하거나 전문가들이 거기에 문외한이다보니, 항상 예술의 담론에 외부 자원을 가져다 썼다. 예술내부의 문제로 시의적절함을 따진적을 나는 절대 보지 못했다. 사회학이나 과학이나 정보학이나... 기타등등.
물론 나는 그것을 선호하지만, 돌이켜보면 뭔가가 거꾸로 되어 있다. 다른 분야를 예술에 끌어 들이는 것은 예술의 관성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꾸로 다른 분야를 끌어들여 예술과 비엔날레를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심지어 그 분야는 컨텍스트를 잃고 마치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인 마냥 다뤄졌다. 지금까지.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