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7일 화요일

성찰의 성찰

https://www.sedaily.com/NewsView/1VN3FFMTIN?fbclid=IwAR0PQOppjjf9O_JVUrCIgLZjtHu0eXfgG46lpEmfpnTeAnDhTlgENhXCW7s

만약 국현에서 검열이 일어났으면 경기문화재단에서 움직였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경기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이 행사는 반일민족주의/국뽕에 기반해 있으며 그럴 때만 공기관에서 '해도 된다'라는 정당성을 얻는다. 이건 그리 올발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어떤가. 국가에 의한 검열에 대한 저항 자체는 바르다. 그런 의미에서는 경기문화재단 주최 행사는 올바른 '효과'를 나타낸다.

이 '효과'의 진정성을 따지는 건 내가 보기에 무의미한 짓이다. 그렇게 따지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경기문화재단 행사는 비판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비판은 진정성 없음에 대한 비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행사를 중화시키면서 검열에 대한 비판적 행위성마저도 중화시킨다. 많은 부분에서 아이이치 트리엔날레에 대한 비판은 민족주의적 태세와 겹쳐있다. 그렇다고 그 비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만약 민족주의를 걸러내고자 한다면 비판마저 멈춰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보다 그 효과를 어떻게 성찰해야 할지를 성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 보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성찰이 첫번째 것이라면 두 번째 성찰은 내가 하고 있는 성찰이 다시 성찰되어야 함을 뜻한다. 누가 그런 일을 할 것인가?

센프란시스코 조약 관련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115485#09T0

2019년 8월 26일 월요일

의도와 효과

분명히 한국의 진보는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보수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때 진보의 자기비판은 보수적 효과에 힘을 보태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보수가 불변하는 지금, 진보가 바뀌고 안 바뀌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보수적 효과를 삭감하는 것에 비해서는. 그것 말고 진보적 효과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내가 여기서 효과라고 부르는 것은 진정한 진보적 실체가 있고 없음을 따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효과는 진정성을 결여한 실체다. 원인 없는 결과. 조준이 빗나갔더라도 과녁을 꿰뚫고야 마는 것이다. 조국은 오발탄일 수 있다. 하지만...

2019년 8월 19일 월요일

rip


깊이에의 강요

오늘은 카페 플레인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깊이에의 강요를 읽었다. 분명히 어렸을 때 봤던 책인 것 같은데, 다시 읽으니 옛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새로 읽는 것 같았다. 최근의 두 작가 사건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비평가에게 "너는 깊이가 없어"라는 말을 들었다는데, 비슷하게 두 작가의 경우 그런 강박을 설정했던 게 아닌가 싶다. 왜 그럴까? 미술계가 깊이가 없기 때문이다. 깊이가 없는 한국 미술계는 작가에게 종종 깊이를 강요한다. 옥인콜렉티브는 그런 지반 위에서 성장한 팀이라고 본다.

2019년 8월 18일 일요일

두 작가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두 작가가 황망하게 목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여기에 관해서는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도, 혹은 비평적으로도 할 말이 있지만, 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나기 전이고 여기도 완전히 나만의 공간은 될 수 없는지라 쓰지 않겠다.

다만 두 작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몇 마디 적고 지나가고 싶다. 새벽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애도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들이 또 자신의 감정을 전시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홍콩 시민에 관한 뉴스를 불티나듯 공유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약한 연대감의 약한 발로.

하지만 이들의 기분이 전적으로 가짜라고 매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들은 부고 소식에 무언가 느꼈을 것이다. 이 기분을 내가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혼자 생각하지 않고 소셜 네트워크에 표현했다. 나는 거기에 의구심을 가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미디어의 매개작용에 대한 불신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본질에서 멀어질 수록 무가치하다라는 플라톤의 유명한 시뮬라크룸에 대한 비판과 같은 견지의 생각을 나 역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것을 모를리가 없다. 두 작가에 애도를 표출한 사람들은 모두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기로 했을까? 혹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분명히 의식적인 차원이 여기엔 있다. 고인에 대한 어떤 충정심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고, 공유 행위를 통해 이들의 죽음이 조금이나마 명예롭기를 바라는 바람이 그 행위를 하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타임라인을 채우는 그들의 언어가 가리키는 바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차원도 있을까? 언어에 미끄러져간 다른 차원.

나는 이 무의식이 그들이 얄팍한 애도의 글을 알면서도 전시할 수밖에 없었던 진정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 사람의 포스팅만 가지고는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다수가 타임라인을 채우기 시작하면 어떤 패턴이 보인다. 나는 여기에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뚜렷한 진영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두 작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보면서 공유와 애도글을 쓰고 이로써 자신의 진영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네트워크의 확인 프로시저가 여기서 작동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미술계에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것은 약한 연대라기보다는 매우 강력한 결속에 대한 열망일지도 모르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2019년 8월 14일 수요일

지역

명사
  • 1.
    일정하게 구획된 어느 범위의 토지.
    한반도 지역
  • 2.
    전체 사회를 어떤 특징으로 나눈 일정한 공간 영역.


지역은 중심과 비중심을 나누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쓰는 지역의 의미는 지방으로 고쳐써야 한다. 왜 지방이 지역이 되었을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