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1일 화요일

비평과 명예훼손

https://docs.google.com/document/d/1NgDa_CqVnQT8tPl5bYVeaJHcwI-OAl9E1673bjUNP-M/edit?usp=sharing&fbclid=IwAR1q2or8lKKE8-62oZhejtbnhZzX7ooOfk7cS8USEI0g-hGdDXDya-L4gl4

진세영의 비평에 관해 이나라가 대응한 글이 화제가 되었다. 진세영의 비평은 '겁없이' 네임드 필자를 거론하면서 이리저리 품평을 한다. 거기서 이나라가 재수없게 걸린 거지. 미술에 대해 닥치고 영화에 대해서만 쓰라고 진세영이 호쾌하게 날렸어. 개인적으론 좀 사이다이기도 했는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나? 이해 못할 것도 없어요. 이나라가 먼저 선방을 날렸거든. 미술계에선 작업을 잘하고자 노력하는 작가는 많은데 작업을 잘 읽고자 하는 관객이 없다고? 영화랑 반대라고? 영화와 미술계를 모두 까는 신박한 말 같긴 한데, 세세하게 그런 걸 다 이해해주긴 싫고, 어쨌거나 교만하기 그지 없는 글인데? 아무튼 진세영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때 진세영은 그야말로 작업을 잘 읽고자 하는 관객1이었다고. 이나라는 원하든 원치않든 비평가의 자리에서 무지랭이들(공부 안 하는 영화 감독, 공부 안 하는 미술 관객)한테 발언하지만 이무렵 진세영은 무명의 지방러, 댓글러 그런 거라고. 미술에 졸라 관심있고 더 알고 싶어하는. 그니까 이나라의 페북 발언은 드러나지 않은 미술애호가의 바닥 심리를 도매금으로 후려 치는 거라고. 너는 없는 존재와도 같다고. 열이 안 받겠나. 이나라는 특정인을 거론 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열받는. 없는 사람 취급 받은 수 많은 사람중 1인으로서 ㅅㅂ 언젠가 한 번 나도 복수한다 그런 마음을 안 가지겠냐고. 그게 그 지면이 된 거지...

이 포스팅은 비평과 명예훼손 사이의 상관관계, 페북의 공적인 성격과 사적인 성격, 비평가의 '계'에 대한 발언은 사적인 발언이냐 공적인 발언이냐 만약 비평가가 페북에 미술계에 대한 논평을 했다면 그건 사적인 발언이냐 그걸 깐다고 돌맹이를 던지는 거고 명예훼손을 하는 일이 될 수 있냐 그런 걸 따져보고자 했으나 다음 기회에 해야겠다.

2023년 4월 3일 월요일

미술왕 글 생각 한스푼

https://echo.pong.pub/9?fbclid=IwAR17fE4pBNn7XEEU13Qrn61mcqcr7Q1HCbg_dF6tWOcDE-apcS89_YbVNxI

최종렬의 복학왕 담론을 깔고 쓴 자기고백이다. 최종렬에 대해선 어느정도 나올 수 있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지방러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최종렬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몇 가지 단상 메모.

1. 소재주의

지방미술이 소재주의에 천착한다고 하는데, 무슨말인지 직관적으로 알 것이다. 달항아리를 30년째 그리고 뭐 그러는 작가가 떠오른다. 여기서 소재주의는 포괄적인 의미로 필자가 썼듯, 어떤 경향성을 띈다는 거다. 근데 실은 모든 작업과 인간은 경향성을 띈다. 안띄는 게 거짓말.. 그게 없다면 미술 작가도 미술사도 없다. 우리가 소재주의라고 경멸하는 작업은 경향성을 가지되 그것이 동의할 수 없는 방향일 때다. 여기에는 사실 느낌만 있을 뿐인데, 비교 대상은 아무래도, 컨템퍼러리아트다. 컨템퍼러리아트와 비슷하지 않은 형태의 경향성은 소재주의다.

소재주의에 대한 영어식, 미술식 표현에서 내가 아는 건 medium specific이다. 따지고 보면 소재주의는 모던아트의 산물이자 정수였다. 하나만 딥따 수련해서 최고봉을 찍는 거다. 매체특정성의 레거시가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 지방이라고 달리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퀄리티가 뭐냐? 왜 지방은 손맛을 아직까지 중요시하고, 형상 친화적이며, 미협 같은 커뮤니티 중심적일까? 그것은 망했다라고 성급하기 결단내리기보다 검토해봐야 할 문제. 그것이야말로 필자가 말한 다원주의 멀티버스 미술이 가능해질 수도 있는 지점

2. 반자기계발의지

최종렬이 말하는 "알려고 하지 않는 의지." 정보가 느리고 무언가 변화가 더디고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그런 지방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한 가지 단서다. 나는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 편인데, 그렇다면 알려고 하지 않는 의지에도 이유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아는 것이 별로 이 커뮤니티에서 필요가 없기 때문인데...

2023년 3월 20일 월요일

놀고 먹는 예술가 스테레오타입

 

예술가가 게을러 보인다는 건 바쁘게 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을 위해서, 배우자나 아내, 자식, 부모를 위해 자신의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이를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사를 위해, 회사를 위해 또 그렇게 한다. 그러다가 병에 걸려 죽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에 속한 이후 도무지 자신을 위해서 생명을 쓰지 않는다.

위에서 예술가가 "살벌하게 바쁜" 이유는 자신 말고 다른 것이 부차적인 이유에서다. 예술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경제적인 면에서는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자신을 위해 가난하게 살 것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사람과 예술가의 차이가 그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예술가는 자기가 원하는 걸 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본업이 아닌 잡일이라고 치부하는 다양한 일은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이 가족과 타인을 위해 목숨 걸고 하고 있는 일이다. 이들이 어떤 경제적 궁핍을 겪더라도 이기적인 선택의 결과로 비칠 뿐이다.

2023년 2월 1일 수요일

글값

김도훈이 쏘아 올린 원고료논쟁.

원고료가 올라야 한다: 동의

낮은 원고료의 이유: 사람들이 (돈을 주고) 글을 읽지 않는다 -> 매체가 가난해진다 -> 매체가 망한다 -> 필자는 매체가 필요하다 -> 공급 과잉 -> 낮은 단가 형성

사람들이 글을 읽지 않는 이유: 사는 데 필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매체를 사지 않는 이유: 그정도 글은 돈 안주고도 읽을 수 있다? = 매체에 실린 글이라고 아주 특별하지 않다 = 돈 안 드는 다른 경로로 그 필자의 생각을 알 수도 있다 = 언어는 기본적으로 아이디어다 등등

사람들이 글에 돈을 쓸 때: 정말 좋은 글이고 모르면 안 되는 글인데 배타적으로 한 매체에만 실렸을 때 -> 이런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음

높은 원고료를 줄 수 있는 경우 : 상품성이 있는 경우(돈이 되는 원고인 경우)


내 생각.

1. 정말로 돈을 벌고 싶다면:

- 원고의 유통을 통제하면 됨. 글쟁이 협회에 가입한 사람만 글을 쓰고 유통할 수 있게 하면 됨. 그리고 협회에서 기준 단가를 정해서 기준미달은 보이콧하자고 담합하면 됨. 마치 예전 등단을 통해 어장관리하듯이. 가능할까?

- 반대로 유통을 늘리고 단가를 더 낮춰서 해결하는 방법. 얼룩소 등 구독플랫폼이 그런데, 이 경우 몰아주기로 될 가능성이 높음. 

- 간단한 계산: 100명의 구독자가 만원씩 낸다면 100만원. 구독자가 곧 필자가 될 수 있으니 필자가 100명이라고 치고 좋아요 당 천원 계산. 인기 필자가 3명이고 좋아요를 각자가 100개씩 받았다치면 10만원을 받네. 90명정도는 좋아요 10개라고 치면 만원. 전체 30만원 + 90만원-> 120만원. 이렇게만 되어도 적자다. 그러니까 얼룩소는 글을 읽자고 하지만 사실은 등록만 해놓고 아무 것도 안 하는 유령회원이 많아야 하고, 인기 없는 필자가 많아서 돈을 못 가져가야 소수의 필자가 그나마 돈을 가져갈 수 있는 구조 <- 안 그러면 회사가 망함. 얼룩소가 잘 되려면 기타 출판시장이 다 망하고 얼룩소란 플랫폼으로 모든 필자가 집결해야 함(유통의 통제). 그냥 뇌피셜.

2. 좌파 인문학의 경우:

- 기본적으로 인기 없는 글(반대중적 견해 등) -> 상품성이 없다 -> 좋아요를 받지도 못한다(얼룩소 탈락)-> 그나마 실어주는 매체는 돈 없는 매체->돈을 못번다

2023년 1월 31일 화요일

강덕구와 윤이랑

최근 두 필자의 책을 읽었다. 

강덕구의 <밀레니얼의 마음>

윤아랑의 <뭔가 뱃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강덕구가 92년생, 윤아랑이 91년생이다. 둘다 90년대 초반생. 새로운 평론가가 안 나올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 둘씩 튀어 나온다. 참 신기하다.

두 필자의 글을 읽으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해박하다. 자기 이야기를 조곤조곤 잘 쓴다.  이 느낌에는 한 가지 의구심도 있다. 어떻게 이런 지식을 다 습득했을까. 현란한 레퍼런스가 무리없이 자기 글 속에 녹아 있다. 언젠가 레퍼런스로 떡칠된 글을 기피하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그것이 '먹고 체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완전 업그레이드 됐다고 해야하나. 레퍼런스가 많다 적다를 떠나서 적절하다.

이 적절한 것에는 또 한 가지 미심쩍음이 있다. 레퍼런스는 굉장히 얕게 인용이 되는데, 딱 자기가 필요한 것만큼만 파고든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 책의 서문 정도, 아니면 출판사 서평 정도만 읽어도 다 알 수 있는 정도가 딱 인용이 된다는 것인데, 재밌게도 이 글에서 그정도면 충분하고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 자체가 레퍼런스가 많되, 그러한 얕은 깊이만을 요구하는 상태로 적절하게 조율되어 있는 상태라, 레퍼런스가 난무해도 오히려 난해하다거나 그런 느낌도 없고, 쉽게 잘 읽힌다. 

음. 얕은 깊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설명이 제대로 안 되고 음..이거 이정도만 나열해놓으면 다 알아듣지? 하면서 중간 다 생략하고 바로 결론을 사용한다고 해야하나. 텍스트의 객체적 사용이라고 해야하나. 객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필요 없다. 객체의 용도만 안다면 프로그래밍 디자인에서 임포트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한 건 그 용도를 정확히 아는 것인데, 글만 봤을 땐 정말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CHAT GPT가 글을 쓰면 이런 느낌이려나? 모르겠다만. ㅎ

아, 인공지능이 흉내내지 못할 것 같은? 것은 뭐냐면, 두 필자 모두 자신의 기분을 글로 굉장히 잘 나타낸다는 것이다. 마치 인터넷 상에서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기 위한 통한의 짧은 댓글이랄까. 한자 세대보다 훨씬더 직관적으로 감각적으로 한글을 조합해서 그렇게 한다. 한자를 모르는 세대는 오히려 한글 사용의 달인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

2023년 1월 19일 목요일

블로그 공개설정

다시 링크가 있으면 접속할 수 있는 블로그로 설정을 바꿨다.
다음은 내가 미술관에 대해 쓴 글을 보면서 공직자 어쩌고 했던 사람들에게 쓰는 말.

다음의 링크 글 참고하시고요.

보시고 욕을 하시던지 마음대로 하세요.
추한 마음만 더 커질 거에요.

2023년 1월 18일 수요일

지방 예술공간도 사랑을 꿈꾼다

소년 용접공으로 이름났던 천현우가 「지방총각들도 가정을 꿈꾼다」라는 글을 써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1) 이 글은 무엇보다 좌파의 빈축을 샀다. 좌파에게 ‘지방’은 구출되어야 하는 중앙의 식민지다. 반면 ‘총각’은 요즘 같아서는 ‘처녀’만큼이나 불러서는 안 되는 혈기 왕성한 구시대적 남성 주체의 형상이다. 지방과 총각은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두 단어 같다. 마치 피해자와 가해자처럼.

왠지 모르게 나에게 천현우가 묘사한 지방 총각의 가정을 향한 소박한 욕망은 지방 예술공간의 알레고리처럼 보였다. 지방에 여성이 없는 이유는 제조업 위주의 산업 구조 때문에 일자리가 없기 때문인데, 마찬가지로 이런 조건에서, 문화계통의 일자리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또한 인구수 자체가 적거나 감소하다 보니 이성끼리 만날 기회도 적다고 하는데, 미술 관련 학과가 신속하게 통폐합되고 있는 와중에 미술 인구 역시 턱없이 적으며, 야심에 찬 예술가나 큐레이터, 이론가가 언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둘러보면 지방을 떠난 지 오래다. 또한 혼인에 성공해도 아이를 낳기도 힘들며, 맞벌이 부부를 위한 지원책이 미비한 지방에서 아이를 키우기가 난망하다고 하는데, 이는 지방의 문예 지원 상황과 흡사하다. 문예 지원이 지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원 규모도 중앙에 비해 턱없이 적은 데다가 지원 방향성도 효용성 중심으로 미묘하게 다르다.

지방에서 예술공간을 운영한다는 것은 마치 남아 있지 않은 이성을 상상하고, 구애하고, 또 가정을 꾸리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한 것 같다. 기획전 《점이지대》가 펼쳐진 사랑농장은 바로 이런 조건 위에 놓였다. 사랑농장이 위치한 경남 김해시 한림면은 소멸하는 지방 중에서도 ‘초토화된 마을’로 불리곤 한다. 한 보도에 따르면, 2017년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이 서울과 제주를 제외한 전국 읍면동의 개별입지 공장 수, 오염부하를 토대로 6개 등급을 나눈 결과 한림면은 0등급을 받았다고 한다.2) 청년들은 모두 떠나고 노인이 어쩔 수 없이 남아서 버티던 중 예술가가 들어왔다. 돼지 사육 농장 한가운데, 어디선가 주워온 영문자 LOVE 간판을 걸면서.

사랑농장이 이러저러한 작가를 모아서 표방한 ‘점이지대’는 여기서부터라고 제안한다. 보통의 기획전에서 제목은 아이디어를 총괄하기 마련이다.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고도로 정밀하고 적확하게 세공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점이지대》는 특정한 예술 작업의 흐름을 제시한다든지, 어떠한 미학적 주제로 작품을 묶어내려는 시도에 관심이 없다. 전시는 작가도 예술도 아닌 어떤 장소의 성격, 비결정적인 상태만을 표현한다. 중요하게도, 그 장소란, 예술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사랑농장’ 그 자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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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이, 한림면은 김해에서도 주변적인 장소로 대중교통으로 방문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차를 운전해서 가면, 지나가면서 볼거리라는 것이 헐겁게, 바람 불면 날아갈 것처럼 만들어진 공장 단지다. 인적은 거의 없고 돼지 사육장이 근처에 많아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차를 운전해 올라가면 예술가스럽게 보이는 사람들 몇몇이 서성이고 있다. 이것이 설마 예술공간일까 싶은, 방치된 듯한 샌드위치 패널 공장이 바로 사랑농장이다. 전시장은 어두침침한데 비단 조명시설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무언가 쾨쾨하고 무언가 텅 빈, 무언가 예쁜 구석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하고 빈곤한,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안 좋은 공기가 감도는, 하루만 전시해도 장비는 고사하고 작품이 다 망가질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감돈다.

그런 곳에 예술가의 작품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두 개의 불길한 신호가 감지된다. 하나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장해서 앞으로 치고 나가자면, 샤로수길, 망리단길, 송리단길이라는 미래. 젠트리피케이션은 오늘날 낯선 현상이 아니며, 어떤 면에서, 지방소멸 시대에, 모든 지자체는 살아남기 위해 “전국의 관광지화”를 바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 잘 알려진 것처럼, 문화요소, 특히 예술가는 가성비 좋은 젠트리파이어(gentrifier)다. 무언가를 효과적으로 변화시킨다. 스스로를 다른 것과 구별해내고 스스로 특별하게 존재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종국에 원주민을 내쫓을지라도, 예술가는 기어코 그렇게 한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여기의 예술가는, 또 한 무리의 젠트리파이어로서 한림면에 광범위하게 퍼진 폐급 공장만큼이나 암세포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예술공간의 잘 알려진 미래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면, 예술공간의 잘 알려진 과거는 지방소멸과 궤를 함께한다. 2014년 《공장미술제》의 작가 대우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출발한 젊은 ‘을’의 분노는 10년 전 386세대와 X세대가 온 힘을 다해 구축한 대안공간 시스템의 효용성 상실을 논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가 되면 공적영역의 문예지원 시스템이 안정화되면서, 신진작가 소개 자체만으로 특별할 게 없어진 시대에, 그렇다고 작품을 팔아줄 수도 없는 대안공간을 청년 예술가는 하나 둘씩 떠난다.4) 누군가는 쉽게 말하곤 했다. 포기하면 편하다. 능력 없으면 더 이상 민폐 끼치지 말고 문을 닫아야 한다고.

그런 면에서 보면, 돼지 농장과 샌드위치 패널로 둘러싸인, 제대로 된 전시장도, 큐레이터도, 행정 시스템도, 예산도 없는, 사람도 잘 찾지 않는, 알려지지도 않은 지방에서, 사랑농장이 예술공간으로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초강력 무리수 그 자체다. 죽음의 이지선다가 눈앞에서 강요된다. 변하면 죽는다: 젠트리피케이션. 변하지 않아도 죽는다: 지방소멸.


***

젠트리피케이션이 완성되면 예술가는 사라진다. 특별했던 예술실천은 도시 디자인과 소비 시스템에 잡아먹혀, 최악의 경우 거주민과 함께 쫒겨나며, 심지어 최선의 경우에도 예술가 마을 같은 낭만 어린 전형이 된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지 않아도 예술가는 사라진다. 예술공간이 별다른 지원책과 매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기피대상이 되어 사라진다면, 역설적으로 예술가는 활동할 근거를 출발 전부터 상실한다.

혹시 문화관광의 소비경험 따위로 외파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종국에 예술가의 지지를 잃어 스스로 내파하는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자기의 특별함과 존재를 지켜나가는 만큼, “전국의 관광지화”의 완성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젠트리피케이션과 지방소멸 양극단과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그것과 멀어지려고 하는, 이중적 과제를 지닌, 그러니까 변화 그 자체를 지속할 방법이 있다면?

그런 생각지도 못한 기똥찬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 리가 만무하다. 사실, 《점이지대》는 어디서나 들려오는 노래를 놀랍도록 성실하게 따라 부른다. 부산과 울산 같은 인근 지역의 작가들이 폐공장 지대에 모였다. 작품을 설치하고 SNS에다가 홍보한다. 나름의 오프닝을 하고 나 같은 큐레이터나 비평가를 초대해 멘토링이란 이름의 세미나도 연다. 사진을 찍고 글을 받고 결과보고집을 출간하고 문서고에 꽂아 놓거나 누군가에게 보낼 것이다: 홍티아트센터나 F1963 같은 많은 기관의 프로그램이 답습하고 있는 프로토콜.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2020년대에는 전형을 이룬다. 백종원 거리를 모든 지자체가 만들려는 것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이 나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종국에 ‘똑같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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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영은 음습하고 외진 공간에 사람들을 모으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 영상 전시를 여는 것이 유효하겠다고 생각했다. 반지하 주택의 창문을 사랑농장의 어두운 벽에 투사하기로 결정한 최은희는 사랑농장을 보면서 반지하의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전수현은 지방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합리와 비합리를 연결하는,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이단적 믿음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출품하기로 결정했다. 최서연은 마르크 오제가 일찍이 말했던, 전통적 공동체가 불가능해진 비장소적 이미지를 사랑농장이란 장소와 겹쳐보았다. 정수는 언어로부터 시각으로 나아가며, 김은지는 이미지로부터 언어를 향해 가며, 둘은 미학적인 분할과 미끌어짐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이 모든 영상과 설치물이, 허름하고 외진 건물 안에서,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흐트러짐 없이 성의 있게 설치됐다.

이상한 건, 지금, 여기서 그것을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발견적인 경험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가성비적 시대정신을 초과하는 경험으로 온다는 사실이다. 최선을 다해 만든 작품을 왜 굳이 여기에 출품하려고 결정한 것인지, 모두들 왜 이 멀고 지저분한 곳까지 와서 무알콜 맥주 캔을 손에 들고 흐느적거리고 있는 것인지, 누군가에게 말을 걸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인지, 왜 그렇게 작업대를 반듯하게 세워서 그 위에 빔프로젝터를 정중앙에 삐뚤어지지도 않고 올려놓은 것인지, 십시일반 돈을 모아 평론가를 잡아 놓고 추운데 밤새도록 집에 가지 않고 작업 이야기를 즐겁게 나눴던 것인지, 감기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마스크를 쓰고서라도 여기에 오고 싶었던 것인지, 그러니까 무엇이 그렇게 절박해서 왜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인지, 이 모든 것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다. 《점이지대》는 그런 장소였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과잉된 무엇이 여기에 투자되었다.

이런 각자의 충실성을, 이런 과잉을, 경남일보의 이정민 기자를 따라서 ‘예술혼’ 말고는 딱히 설명할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5) 이런 예술혼은 시작부터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의 예술공간이란 점을 떠올려 봤을 때 차고 넘치는 무엇이 아닐 수가 없다. 또한 문화적 키치를 만드는 젠트리파이어란 용기에도 채 모두 담길 수 없는 무엇일 테다. 예술혼이 구차다고 조롱받는 시대에, 예술공간이 작가 커리어의 지렛대로서 기능하지 않는다면 무가치해지는 시대에, 이름 없는 공간에서 행사를 만들고, 사람을 모으고, 여기에 충실히 화답하는 일련의 과정은, 심지어 그것이 이미 잘 알려진 배관을 따라 흐른다 하더라도, 압이 차서 팽팽 부풀어 오르고 찢어진 틈으로부터 터져 나온다.


*****

돌아가서, 어쩌면 지방총각은 영원히 가정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혼을 못한다고 사랑을 못하는 건 아니다. 가난한 사람도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고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점이지대》는 예술가의 사랑농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관심 가져주지 않아도, 알 수 없어도, 가까운 미래에 이곳이 설령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우리가 모여 작업을 보고 이야기하고 웃고 떠드는 그런 꿈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런 장소, 그리고 그런 일을 앞으로도 계속 꿈꾸고 싶다는 희망. 《점이지대》는 사랑농장이 취한 그러한 종류의 태세로 보였다.


1) 천현우, 「[2030 플라자] ‘지방 총각들’도 가정을 꿈꾼다」, 《조선일보》, 2022. 9. 15.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09/15/IADOUZTNAVDMHHLXCYX6GOL6V4/ (접근: 2023. 1. 16.)

2) 윤지로, 「암세포 번지 듯…느슨한 규제에 공장은 마을을 집어삼켰다 [우리의 환경은 평등합니까]」, 《세계일보》, 2019. 3. 7. https://www.segye.com/newsView/20190306004667 (접근: 2023. 1. 16.)

3) 앞으로 지칭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백종원과 예산군의 관계처럼 공공영역과 영합하는 지방재활성화 정책에 가깝다. OSEN, 「시장으로 간 백종원, ‘전국의 관광지화’ 새로운 바람 만들다」, 《조선일보》, 2022. 10. 04. https://www.chosun.com/entertainments/broadcast/2022/10/04/46WSM632H67IP2WDLR3KSWHS4Y/ (접근: 2023. 1. 17.)

4) 여기에 관해선 나의 「신세대 담론의 작은 역사: 2013-2016」를 볼 것. 《아트신》, 2019. 2. 12. https://www.artscene.co.kr/1680#footnote_link_1680_3 (접근: 2023. 1. 17.)

5) 이정민, 「경계 넘나든 시선, 김해의 점이지대 작가 5人 예술혼」, 《경남일보》, 2022. 9. 29.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504777 (접근: 2023. 1. 17.)


2023. 1. 18.


사랑농장 <점이지대> 카탈로그 글로 쓰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