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역꾸역 보고 있다. 집중하진 못하고 느낌만 파악하는 중..
임태훈 선생의 오구리 고헤이 짧평:
다음날 우리는 저녁까지 숙취로 고생했다. 그리고 친구와 나는 우리가 너무 경각심을 잃은 것이라며 반성하고 다시는 현지인과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처음 본 낯선 이들을 어떻게 믿고 이런 짓을 했을까라며 자책도 많이 했다.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서 다행이지 여자 둘이서 무슨 일이라도 당했으면 어쩔 뻔했냐고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혼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잘못이 없다. 우리가 부주의했던 거지. 부주의했고 경험도 없었으며 분별력도 없었다. 다음날 우리를 걱정해서 찾아온 그들을 외면하고 숙소를 몰래 빠져나왔던 우리가 정말 어리석었다. 받은 환대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하고 거절은 진심을 담아 조심스럽게 상대방에게 전했어야 했는데... 그 후 한동안은 낯선 이들과의 대화를 피했다. 하지만 그렇게 폐쇄적으로 여행하는 것은 여행의 만족도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풍요롭게 하는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기 위해 나는 다음의 규칙을 만들었다.
1. 낯선 이와 둘만 있는 장소는 피할 것.
2. 함께 걷거나 이동하기 보다는 한 자리에서 대화할 것.
3. 2명 이상일 경우 서로 낯선 이가 아닌 사전에 알고 있는 일행들이라면 피할 것
4. 술은 반드시 직접 사서 마실 것
5. 스킨십이나 대화에 불쾌한 것이 있다면 바로 표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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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수현, <롤링>, 2023, 스컬피, 테라코트, 아크릴, 모터, 우레탄폼, 스프레이, 38x 37.5x 42cm. |
진세영의 비평에 관해 이나라가 대응한 글이 화제가 되었다. 진세영의 비평은 '겁없이' 네임드 필자를 거론하면서 이리저리 품평을 한다. 거기서 이나라가 재수없게 걸린 거지. 미술에 대해 닥치고 영화에 대해서만 쓰라고 진세영이 호쾌하게 날렸어. 개인적으론 좀 사이다이기도 했는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나? 이해 못할 것도 없어요. 이나라가 먼저 선방을 날렸거든. 미술계에선 작업을 잘하고자 노력하는 작가는 많은데 작업을 잘 읽고자 하는 관객이 없다고? 영화랑 반대라고? 영화와 미술계를 모두 까는 신박한 말 같긴 한데, 세세하게 그런 걸 다 이해해주긴 싫고, 어쨌거나 교만하기 그지 없는 글인데? 아무튼 진세영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때 진세영은 그야말로 작업을 잘 읽고자 하는 관객1이었다고. 이나라는 원하든 원치않든 비평가의 자리에서 무지랭이들(공부 안 하는 영화 감독, 공부 안 하는 미술 관객)한테 발언하지만 이무렵 진세영은 무명의 지방러, 댓글러 그런 거라고. 미술에 졸라 관심있고 더 알고 싶어하는. 그니까 이나라의 페북 발언은 드러나지 않은 미술애호가의 바닥 심리를 도매금으로 후려 치는 거라고. 너는 없는 존재와도 같다고. 열이 안 받겠나. 이나라는 특정인을 거론 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열받는. 없는 사람 취급 받은 수 많은 사람중 1인으로서 ㅅㅂ 언젠가 한 번 나도 복수한다 그런 마음을 안 가지겠냐고. 그게 그 지면이 된 거지...
이 포스팅은 비평과 명예훼손 사이의 상관관계, 페북의 공적인 성격과 사적인 성격, 비평가의 '계'에 대한 발언은 사적인 발언이냐 공적인 발언이냐 만약 비평가가 페북에 미술계에 대한 논평을 했다면 그건 사적인 발언이냐 그걸 깐다고 돌맹이를 던지는 거고 명예훼손을 하는 일이 될 수 있냐 그런 걸 따져보고자 했으나 다음 기회에 해야겠다.
https://echo.pong.pub/9?fbclid=IwAR17fE4pBNn7XEEU13Qrn61mcqcr7Q1HCbg_dF6tWOcDE-apcS89_YbVNxI
최종렬의 복학왕 담론을 깔고 쓴 자기고백이다. 최종렬에 대해선 어느정도 나올 수 있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지방러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최종렬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몇 가지 단상 메모.
1. 소재주의
지방미술이 소재주의에 천착한다고 하는데, 무슨말인지 직관적으로 알 것이다. 달항아리를 30년째 그리고 뭐 그러는 작가가 떠오른다. 여기서 소재주의는 포괄적인 의미로 필자가 썼듯, 어떤 경향성을 띈다는 거다. 근데 실은 모든 작업과 인간은 경향성을 띈다. 안띄는 게 거짓말.. 그게 없다면 미술 작가도 미술사도 없다. 우리가 소재주의라고 경멸하는 작업은 경향성을 가지되 그것이 동의할 수 없는 방향일 때다. 여기에는 사실 느낌만 있을 뿐인데, 비교 대상은 아무래도, 컨템퍼러리아트다. 컨템퍼러리아트와 비슷하지 않은 형태의 경향성은 소재주의다.
소재주의에 대한 영어식, 미술식 표현에서 내가 아는 건 medium specific이다. 따지고 보면 소재주의는 모던아트의 산물이자 정수였다. 하나만 딥따 수련해서 최고봉을 찍는 거다. 매체특정성의 레거시가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 지방이라고 달리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퀄리티가 뭐냐? 왜 지방은 손맛을 아직까지 중요시하고, 형상 친화적이며, 미협 같은 커뮤니티 중심적일까? 그것은 망했다라고 성급하기 결단내리기보다 검토해봐야 할 문제. 그것이야말로 필자가 말한 다원주의 멀티버스 미술이 가능해질 수도 있는 지점
2. 반자기계발의지
최종렬이 말하는 "알려고 하지 않는 의지." 정보가 느리고 무언가 변화가 더디고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그런 지방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한 가지 단서다. 나는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 편인데, 그렇다면 알려고 하지 않는 의지에도 이유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아는 것이 별로 이 커뮤니티에서 필요가 없기 때문인데...
예술가가 게을러 보인다는 건 바쁘게 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을 위해서, 배우자나 아내, 자식, 부모를 위해 자신의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이를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사를 위해, 회사를 위해 또 그렇게 한다. 그러다가 병에 걸려 죽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에 속한 이후 도무지 자신을 위해서 생명을 쓰지 않는다.
위에서 예술가가 "살벌하게 바쁜" 이유는 자신 말고 다른 것이 부차적인 이유에서다. 예술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경제적인 면에서는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자신을 위해 가난하게 살 것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사람과 예술가의 차이가 그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예술가는 자기가 원하는 걸 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본업이 아닌 잡일이라고 치부하는 다양한 일은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이 가족과 타인을 위해 목숨 걸고 하고 있는 일이다. 이들이 어떤 경제적 궁핍을 겪더라도 이기적인 선택의 결과로 비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