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16일 목요일

비평이란

한국사람들은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과유불급. 돼지목에 금목걸이.

단 고정 게시물

저는 실은 지금 우리가 정상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낙관하고 있습니다.
평론이란 것을 폄훼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유독 정치평론은 그것이 지니고 있거나 생산하는 가치에 비해 과잉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령 아무리 절륜한 문학평론이라도 그것이 클래식 반열에 오른 작품 자체를 뛰어넘을 순 없다는 것이 저의 고정관념입니다.
그 어떤 훌륭한 음악평론이라도 위대한 뮤지션의 음악을 흔들 순 없다는 것이 저의 편견입니다.
그 어떤 빛나는 통찰력을 가진 경제평론이라도 경제 그 자체에 영향을 주진 못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누구라도 그 평론가 혹은 우리 경제 자체를 위험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평론은 몸통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대상에 대한 해석의 틀을 제공할 뿐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평론은 무엇에 대해 대신 판단해주거나 방향을 찍어줄 수 있는 영향력으로 작동하여서는 곤란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데 참고가 되게 하는 정도의 기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독 정치평론만 그 정도를 아득히 초월하여, 정치 그 자체를 흔들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 보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정치평론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때도 있습니다.
제도와 규범으로 통제할 수 있는 (혹자는 재래식이라고 말하는) 언론 보다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는 평론이나 유튜버가 더 큰 영향력과 권위를 갖는 현상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저는 이를 미디어환경의 변화로 파생된 현상이라고 봅니다.
대중이 듣고 싶은 것을 잘 만져 들려주는 기술만 있으면, 그 자체로 생산하는 가치에 비해 과잉된 영향력을 행사하고 부를 가져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제가 유시민 작가님 말씀에 피식했던 대목이 있습니다.
‘같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수십개씩 방송 돌아다니며 했던 말 또 하는 그런 비평에 뭘 들을 게 있겠어.‘
그런데 사실 (정치) 평론하는 스피커란 건 딱 그 정도 좆밥이면 되는 겁니다.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가져도 그저 논평하는 일을 하는 것일 뿐, 여러분들이 과하게 이입할만큼 대단한 투사나 사상가 같은 게 아닙니다.
A방송을 보지만 B방송은 보지 않는 이를 고려해, 혹은 B 방송은 보지만 A 방송은 보지 않는 이도 힘께 고려하여, 그저 한 명의 ‘직업’으로서 이 프로, 저 프로 다 나가서 정보와 해석을 늘어놓으면 되는.
그것을 시민들이 출근 준비하며 백색소음처럼 틀어둔 뉴스에서 누군지도 모를 비평가의 논쟁을 심드렁하게 듣다가 꺼버리는.
그 중에서도 ’직업윤리‘를 잘 지키면 더 많이 신뢰받아 쓰이는 다른 여느 직종처럼, 비평도 사실관계를 꼼꼼히 체크하고, 논리적 정합성을 잘 별러서 하는 이라고 평가받으면, 그가 현장에서 좀 더 많이 호출 되기도 하는.
딱 그런 정도면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채널 몇 개가 자기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사회적 여파와 여론의 왜곡을 만들어 휘청대는 게,
그리고 그런 채널들에 유명한 비평가가 한 두 번 나가 떠들면, 설사 그것이 아무 정보값도 없는 선동적 소음인데도,
온 사회가 마치 대단히 중요한 의제라도 논하는 양 뒤덮여버리 과잉이 발생하는 게, 건강하지 못한 거죠.
30만이 구독하든 300만이 구독하든 그 콘텐츠를 마음에 들어하는 소비자들이 그 안에서 소비하고 치우면 그만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거지,
딱히 저널리즘 윤리도 지키지 않으며, 기성 언론이 하는 게이트키핑을 하지도 않고, 그들이 받는 제도적 통제의 반의 반도 받지 않으며,
어느 날 내키면 정치예능을 하고, 또 어느 날 내키면 거짓말로 진영논리에만 복무하는 선동이나 하는 종자들이 무슨 사회적으로 대단히 의미있는 토론을 주도하거나 화두를 만들어 던지는 대안 언론이라도 되는 양 지랄떠는 시대가 얼른 지나가야 한다, 이 이야깁니다. (전한길 뉴스 말한 겁니다ㅋ)
그러려면 휘청이는 정치와 비틀대는 언론이 이 현기증 나는 뉴미디어 시대에 어떤 새로운 중심을 찾아 잡으며 공동체의 신뢰자원을 회복하는 패러다임을 만들고,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겠지요.
그것이 어느 한 개인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한 명의 비평가가 중구난방 흩뿌린 자의식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떠들며 사회적 에너지 낭비하는 것 보다 우리 공동체에 훨씬 중요한 토론일 겁니다.
동종 업계 동료 여러분, 그리고 언론인 여러분, 포기하지 말고 힘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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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8일 수요일

이력을 정리하는 일

최근에는, 아니 아마도 미술관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이력을 정리하는 일을 그만뒀다. 큰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큐레이터 시절 글 하나 쓴 이력, 어딘가에 패널 디스커션으로 참여한 이력 하나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이제 너무 흔해져버렸고 그것 하나 참여 여부가 나의 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편으로 그 의미는 이런 거다. 더 이상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기관에서 일하는 건 가능성의 변동성이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어느 정도는 미래가 예정되어 있고, 그 길 외에 더 좋은 길을 가기란 지금까지 왔던 길보다 훨씬 힘들다. 가성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변화하기는 힘들 것 같고 과거로 돌아가기도 싫다. 그 의미는 어떤 일에도 최선을 다할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가 이제 40살이 넘었는데 이런 고민이라니. 좀 우습다.

2026년 6월 30일 화요일

[스크랩] 김종길, 박용숙

[샤머니즘 미학 _ 박용숙]
샤머니즘 미학론의 선구자
- 박용숙 선생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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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미술세계 2018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부고 기사를 겸해서 쓴 글이다.
길벗들이 최근 박용숙 선생님 천부경을 공부 중인데, 함께하지 못하고, 마음만 동동 거린다.
2017년에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그 당시에 천부경을 쓰고 있다 했다. 떠나시고 벌써 8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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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박용숙 선생께서 지난 (2018년) 11월 3일 별세했다. 11월 4일자로 언론이 타전한 부고기사는 대부분 “소설가․미술평론가 박용숙 전 동덕여대 교수 별세”를 제목으로 달았고, 간략했다. 그가 살아 온 삶과 그가 성취한 학문적 세계를 생각하면 거의 무관심 수준이 아닐까 한다.
1935년에 났으니 올해 여든 셋인 그는 최근까지도 집필활동을 지속해 온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다. 문학 미술 역사 철학 신화 고전에 이르기까지 그의 학문적 관심은 방대했고, 그것을 비단실로 꿰는 글쓰기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독서는 동서 문명사를 관통하면서, 샤머니즘과 기독교 불교 유고 등을 통섭시키는 카오스모제(chaosmose)의 저술로 이어졌다.
『신화체계로 본 한국미술론』(일지사, 1975)과 『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샤아머니즘 연구』(일지사, 1976)는 그 첫 결과물이었다. 『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은 절판되지 않고 79년, 88년, 92년에도 중판이 이어졌으며, 일본의 제일서방(第一書房)에서 『샤머니즘으로 본 한국고대미술문화 사론シヤーマニズムよりみた朝鮮古代文化論』(1985)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신화체계로 본 한국미술론』이후 50여년의 집요한 연구를 거쳐 그는 올해 『천부경 81자 바라밀 : 천부경에 숨겨진 천문학의 비밀』(소동, 2018)을 펴냈다. 이 책은 그가 오랫동안 궁구하고 사유한 동아시아 시원문명과 미학적 코드였다. 2010년 그는 소동 출판사에서 『샤먼제국: 헤로도토스 사마천 김부식이 숨긴 역사』를 펴냈는데 이 책이 그의 마지막 3부작의 첫 권이었다. 5년 후, 같은 출판사에서『샤먼문명: 별과 우주를 사랑한 지동설의 시대』를 펴냈고, 그것이 두 번째였다. 샤먼제국에서 샤먼문명, 그리고 천부경으로 이어지는 책들은 샤머니즘에 기초한 ‘박용숙 미학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누구이며, 무엇이 그를 그토록 샤머니즘에 천착하도록 이끌었을까? 또 그가 밝히고자 한 동아시아 미학의 시원적 구조는 무엇일까? 이 글은 박용숙 선생을 추모하며, 그의 비평세계가 우리 미술계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첫 단추를 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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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워크숍 기획
그는 함경남도 함주(咸州)에 났고, 6.25전쟁이 터지자 1.4 후퇴 때 남한으로 건너왔다. 중앙대 국문학과와 연세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고, 동덕여대 교수로 2004년에 퇴직했다. 1959년 『자유문학』에 「부록」, 「이름 없는 훈장」이 추천되어 소설가로 데뷔했고, 1970년대 초부터 현실의식이 담긴 작풍(作風)을 보이기 시작했다. 「소경 아즈바이」「목수 아바이」「목수 아바이」, 「어금니 한 개」 등의 단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문학보다는 미술계에서 더 두드러진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된 뒤 그는 월간 『다리』에 「식민지 시대의 미학 비판」(1972)을 발표했고, 1973년부터 75년까지 월간 『공간』의 편집장을 지내면서 1974년 2월 『공간』에 「민족적 리얼리즘은 가능한가」를 싣기도 했다. 그의 평론은 1980년대 민중미술을 예고하는 매우 귀중한 평론이다.
1970년대 후반, 그는 동덕미술관 관장이 되었고 ‘현대미술 워크숍’을 기획했다. 특히 1981년에 기획한 <현대미술 워크숍 기획전>과 강연회, 세미나는 우리 현대미술사의 큰 사건으로 기록된다. 기획전은 동덕미술관에서 개최되었는데, <S.T.>, <서울 ’80>, <현실과 발언> 등 3개 그룹이 초대했다. 전시는 <S.T.>, <서울 ’80>이 6월 25일부터 7월 1일까지, <현실과 발언>은 7월 2일부터 8일까지였다. 강연과 세미나는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7월 4일부터 5일까지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고 주제는 “그룹의 발표양식과 그 이념”이었다.
그는 전시 서문에서 “<S.T.>는 <A.G.>가 해데된 이래 줄곧 70년대의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으며, <서울 ’80>은 80년대에 들어와 새로 출발한 그룹이다. <S.T.>가 전위적인 문제의식에 있어서 비교적 포괄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면 <서울 ’80>은 보다 더 단위적인 것으로 첨예화 된 성격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70년대와 80년대의 성격의 차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현실과 발언>은 장을 달리할 만큼 그 성격이 특수하다. 그들의 목소리는 어두운 방 속의 모기소리가 아니라 들판에서 울부짖는 사자의 목소리이고자 한다. <S.T.>와 <서울 ’80>이 미니멀의 미학을 대표한다면 <현실과 발언>은 맥시멀의 미학을 지향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고 적었다.
그는 기획전과 워크숍으로 세 개의 그룹을 새끼줄로 꼬았다. 세 그룹의 색깔은 ‘성격의 차이’만큼이나 달랐고, 그 다름과 차이는 70년대와 80년대를 가늠하는 ‘가늠자’와 다르지 않았다. 미니멀과 맥시멀이 회오리로 휘돌아 갈 때, 한국현대미술은 용솟음치듯 치솟았다. 1980년대 민중미술은 그렇게 포문을 열었다. 시대를 꿰뚫었던 그의 이러한 기획은 지속되지 못했으나, 이후 그는 출판기획을 통해 그의 사슴뿔 사유의 씨알들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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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체계, 혹은 원형에 대한 추구
1975년, 그의 나이 마흔에 발표한 『신화체계로 본 한국미술론』(일지사, 1975)은 그의 샤머니즘 미학론의 구조를 살필 수 있는 초기 저작이다. 책의 내용은 “1. 신화의 전개”, “2. 종교와 미술”, “3. 회화”, “4. 조각”, “5. 신기(神器)”로 되어있는데, 1부가 흥미롭다. 그는 한국미술론의 첫 머리를 ‘신화의 전개’로 채웠다. ‘전개’라고 썼으나 그것은 구성인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열 네 개의 구성인자는 1)象과 形, 2)조선이란 달, 3)해님(天皇), 달님(地皇), 4)환인(桓因), 5)환웅(桓雄), 6)별님(人皇), 7)화랑도(花郞徒), 8)가운데 한울(中朝와 中天), 9)단군, 10)북두칠성(中華), 11)해님, 달님, 별님(三皇五帝), 12)玄妙之道와 三韓設, 13)惡(疫)神과 洪水(chaos), 14)천당과 지옥 등이다. 그는 왜 이것들에 주목했을까?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적은 물론 신화의 연구가 아니라 미술에 관한 연구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대로 전통미술은 신화체계에 대한 정당한 지식이 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전통미술의 연구가 양식연구에서 머무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 즉 신화적 장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 이어서 그는 1976년 일지사에서 『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샤아머니즘 연구』를 펴낸다.
머리말에서 “이 책의 중요한 관심사는 음양오행의 원리가 어떻게 종교나 정치에 적용되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다행히 필자는 음양오행의 비밀을 담고 있는 천부경을 알게 되었고, 그로 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샤어머니즘의 체계에 접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 앞의 문장을 보면, “이미 이전에 『신화체계로 본 한국미술론』에서 샤아머니즘이 곧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신정정치였다고 썼으며, 그러한 정치적인 이념이 산수화나 사군자화에 표상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고 했다.
열 네 개의 구성인자는 결국 우리 미술을 해제하는 중요한 코드였던 셈이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회화의 방법과 구도』, (집문당, 1980)와 『한국의 시원사상』(문예출판사, 1985), 『한국미술의 기원-미술사의 근본 문제』(예경산업사, 1990)으로 이어진다. 그가 ‘시원’과 ‘근본’을 따지는 것은 ‘자생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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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미술의 기원』에서 “엄밀하게 말해서 자생력이란 문화적인 창조자가 처음 그가 만든 기틀 속에 놓았던 여러 사물들에 부여한 본래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그 최초의 이름 속에는 그 사물의 의미와 기능이 함축되어 있으며, 신화는 그 이름을 능률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전승하려는 의지 때문에 언제나 알몸처럼 단순해지려 한다. 삶의 모습이 복잡해질수록 상대적으로 신화는 더욱 알몸[原型]으로 존재하려는 위상에 있게 되고, 그럴수록 그 본래의 이름들은 문화라고 불리는 여러 갈래의 지층 속으로 묻혀버리게 됨으로써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초의 이름, 단순해 진 알몸, 그는 원형으로서의 알몸을 추궁해야만 지금, 여기의 우리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근 민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우리 미술의 근본이 ‘채색화’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는 이미 『한국미술의 기원』제1장 제1절 주제를 “채식화가 회화의 원줄기이다”라고 적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하나의 원형으로 제시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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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의 미학론
샤머니즘에 대한 그의 연구는 일흔이 넘어서 완성되었다. 첫 책 『샤먼제국: 헤로도토스 사마천 김부식이 숨긴 역사』(2010)과, 두 번째 책 『샤먼문명: 별과 우주를 사랑한 지동설의 시대』(2015), 그리고 세 번째 책 『천부경 81자 바라밀 : 천부경에 숨겨진 천문학의 비밀』(2018)은 그가 그토록 완성하고 싶었던 샤머니즘 미학론의 별자리아도 같다. 우리는 이 별자리의 우주적 세계를 통해서 인류가 상실한 시원문화의 상징체계와 미학의 뿌리에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가 쉼 없이 파고 들어간 그 세계는 실증사학으로는 그릴 수 없는 신화계이자 상상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파편적으로 이뤄진 다양한 학제적 연구의 성과들을 잇고 덧대고 붙여가면서 상상계를 현실의 언어로 직조하기 시작했다. 일흔이 넘어서야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그 구조의 알고리즘이 어떤 흔적을 복원하고 붙잡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비단실로 꿰는 일은 지식의 그물코가 천 개 만 개로 이어져야만 가능하다.
『샤먼제국』의 ‘저자의 글’은 “샤머니즘이라는 지도의 발견”을 주제로 작성되었다. 첫 문장은 “상상력이라는 이름의 배가 있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그 배의 속성은 그렇다. 이미 정해져 있는 물길을 따라 안전하게 다니는 배가 아닌 것이다. 방향타도 없지만 배는 무엇을 믿는지 험난한 파도가 넘실대는 망망대해를 헤집는다. 혹자는 말한다. 사학(史學)은 실증학문인데 어떻게 역사를 상상력에만 의존하는가. 하지만 서양사학의 거목인 랑케(1795~1886)는 『세계사의 이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바람직한 목표는 이데아를 지키는 일이며 이는 사실(학문)과 추리(예술)를 올바르게 결합하는 일이다.’ 그럴 것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승자가 패자의 주체를 지우는 음모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랑케가 말하는 추리는 곧 상상력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상상력’이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고대사 항해에 나섰던 계기는 고고학자 김원룡 선생 때문이었다. 1972년을 시작으로 공주 무령왕릉, 경주의 98호 고분, 고령 가야 고분들이 연달아 발굴되기 시작했을 때, 김원룡 선생은 박용숙 선생을 현장에 데리고 다녔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한반도의 문화적 원형이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라시아 전체의 문화적 코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상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는 강릉 단오제로 첫 항해를 하면서 지도를 그리는데 그 발상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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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는 연중 태양광(陽氣)의 밀도가 가능 높은 시간대이고, 이는 샤머니즘 시대 태양신의 날이다. 무당들은 올림포스(대관령)로 올라가 신수(神樹)를 잘라 지상(祭場)에 세우고 그곳에서 제석풀이 굿을 한다. 제석은 제우스이고 ‘풀이’는 그리스 무녀들이 제우스 축제에서 부르는 디티람보스 찬가이다. 여러 날의 축제가 끝나면 제터에 세워졌던 신수는 불길에 활활 타오르고 무당들은 슬픈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 이때 바빌로니아에서는 씨의 제공자를 대표하여 아도니스가 말뚝에 묶이어 불에 탄다. 이것이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그토록 지루하게 기록해 놓은 태양신의 축제가 아니고 무엇일까. 개안(開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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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눈을 떴다. 눈을 뜨니 문헌만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펴낸 책이 1996년의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이다. 이것은 그가 그리기 시작한 샤머니즘 지도의 ‘소박한’ 밑그림이었다. 『샤먼제국』은 제1장 “태양신과 샤머니즘”을 시작으로 제19장 “샤머니즘의 몰락과 불교의 승리”까지 이어진다. 그는 불교가 유래하면서 샤머니즘이 몰락했다고 본다. 『샤먼제국』이 샤머니즘의 역사서라면 『샤먼문명』은 샤머니즘의 상징사전이다.
특히 그는 이 책에서 천문학과 샤머니즘을 하나의 상징계로 엮어낸다. 그리고 그 상징계의 샤먼문명이 고대 국가에서 어떻게 현실화 되었고 작동했는지를 살핀다.
그가 여는 글에서 “샤머니즘, 그 새 이력서”라고 했듯이 『샤먼문명』은 샤머니즘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상상력이다. 그의 상상계가 이뤄낸 문화구조학적, 문화인류학적 샤머니즘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는 저자의 글에서 “심지어 샤를 스테파노프 같은 학자는 석가모니도 샤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이 ‘신라 고대의 영험한 종교(新敎)가 동력을 잃으면서 거기에서 불교나 도교 같은 종교가 나왔다’고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최치원이 말한 영험한 종교란 다름 아닌 샤머니즘으로 그 말의 바닥에는 샤머니즘이 불교와 마찬가지로 고등종교라는 사실이 깔려 있다. 20세기 샤머니즘 연구의 대가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현대 문명의 간판스타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가 샤머니즘을 계승했다고 말한다. (…) 이 문명의 상층구조에는 샤먼 집단이 자리하고 있었음도 주목할 일이다. 그들은 사제이며 예언자였고 동시에 의사이자 마술사였으며 또한 점성술사들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의 주장은 샤머니즘이 불교나 기독교 문명의 원문명(原文明)이라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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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일, 필자는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박용숙 선생을 만났다. 월간 『미술세계』에 「민중미술 연대기」를 연재하면서 꼭 만나야 할 평론가로 선생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74년에 구상한 ‘민족적 리얼리즘’은 무엇이고, 1981년의 ‘현대미술 워크숍’ 뒷이야기도 듣고 싶었으며, 무엇보다 샤머니즘 미학론을 그토록 집요하게 공부한 이유는 무엇인지도 여쭈었다. 선생을 만나러 가기 전에 『샤먼제국』과 『샤먼문명』을 사서 읽었고, 만나러 갈 때는 그 책을 들고 나가서 이것저것 짚어가며 여쭙기도 했다.
선생은 맑았고 또렷했으며, 미소년처럼 웃었다. 이야기 끝에 선생은 『천부경 81자 바라밀』을 집필 중이라고 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선생은 거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올해 1월 18일, 소동출판사에서 그 책이 출판되었고, 지난 달에 그가 바라보았던 자미궁의 한 별자리로 돌아갔다. 『천부경 81자 바라밀』에서 몇 개의 구절을 뽑았다.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문고리를 잡아야 한다. 그것이 문으로 들어가는 순서이다. 《천부경》의 문고리는 ‘무無’라는 글자이다. 이 글자의 숨은 뜻을 알아야 《천부경》의 시작인 ‘일시무시一始無始’라는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있다.”
“거의 모든 문헌에서 무無는 ‘없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 그러나 그냥 ‘없다’라고 풀면 ‘일시무시一始無始’의 뜻을 읽어낼 수 없다. 다른 《천부경》 연구자들의 풀이처럼 ‘일시무시一始無始’를 ‘없는 곳에서 하늘과 땅이 시작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하나마나한 소리가 된다. 여기에서 무無는 다름 아닌 피라미드의 스핑크스로 보아야 한다. 노자는 ‘무無가 천지天地의 시작’이라고 했다.”
“1은 태양이고 2는 달이며 3은 새벽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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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숙 선생의 대표 저서와 번역서
『신화체계로 본 한국미술론』(일지사, 1975)
『한국화의 세계-교양인을 위한 신서』(일지사, 1975)
『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샤아머니즘 연구』(일지사, 1976)
『현대미술의 구조』(열화당, 1976)
『박수근, 그의 향토색 짙은 회화 세계와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을 찾아서』(열화당, 1979)
『회화의 방법과 구도』(집문당, 1980)
『한국의 시원사상』(문예출판사, 1985)
『한국미술의 반성적 이해』(집문당, 1987)
『전통미술의 재발견』(일지사, 1988)
『한국미술의 기원-미술사의 근본 문제』(예경산업사, 1990)
『황금가지의 나라』(철학과현실사, 1993)
『수메르 신화에서 알타이 신화까지-지중해 분명과 단군조선』(집문당, 1996)
『한국미술사 이야기』(예경, 1999)
『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예경, 2003)
『샤먼제국: 헤로도토스 사마천 김부식이 숨긴 역사』(소동, 2010)
『한국화 감상법: 현대 한국화의 전개와 이해』(대원사, 2010)
『샤먼문명: 별과 우주를 사랑한 지동설의 시대』(소동, 2015)
『별이 되고 별자리 되고(해달별 옛이야기2』(창비, 2018)
『천부경 81자 바라밀 : 천부경에 숨겨진 천문학의 비밀』(소동, 2018)
『예술이란 무엇인가』(문예출판사, 1984), 수진 K. 랭거 지음, 박용숙 옮김
『예술의 의미』(문예출판사, 2007), 허버트 리드 지음, 박용숙 옮김

2026년 6월 11일 목요일

할 포스터, 뒤샹 한 첩

클로드 기계번역. 너무 잘한다..

Hal Foster · At MoMA: A Dose of Duchamp
뒤샹 한 첩

할 포스터 — London Review of Books, Vol. 48 No. 10 (2026년 6월 4일)

1973년, 마르셀 뒤샹 회고전이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열렸을 때, 비평가 루시 리파드는 이미 뒤샹이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도처에 있다. 레디메이드 오브제라는 그의 오래된 주제의 무한한 변주들을 우리는 계속 보고 있다. 그러나 뒤샹 피로증의 최선의 치료법은 진품을 대량으로 투여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재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리고 있는 회고전(8월 22일까지)에서 큐레이터들이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6층 전체가 300여 점의 작품에 할애되어 있고, 복제본, 노트, 문서, 온갖 종류의 에페메라로 채워진 진열장들이 즐비한데, 그중 일부는 뒤샹 전문가들에게도 새로울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전시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한데, 이는 MoMA와 필라델피아미술관(PMA, 회고전의 다음 순회지)의 탁월한 뒤샹 컬렉션을 과시할 뿐 아니라 이 기관들의 대여 동원력까지 입증한다.

뒤샹은 많은 관람객에게 익숙한 존재일 텐데, 세 명의 큐레이터—MoMA의 앤 템킨과 미셸 쿠오, PMA의 매슈 애프런—는 관람객을 깔보지 않는다. 월텍스트는 담백하다. 관람자에 대한 이런 신뢰는, 1957년 '창조적 행위'에 관한 강연에서 작품의 운명에서 수용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던 뒤샹 자신의 입장과도 부합한다. 그리고 이 전시를 계기로 뒤샹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달라질 것이다. 예컨대 통상적 서사에서는, 동료들이 그의 출품작인 입체-미래주의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2번)〉(1912)를 파리 앵데팡당전에서 거부하자 뒤샹이 회화를 포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뒤샹이 회화를 거부했다면, 회화 역시 그를 거부했다. 그는 서툰 화가였고, 모네와 드가풍의 얼룩덜룩한 풍경화와 볼품없는 누드들이 점점이 걸린 첫 전시실이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뒤샹은 잡지 삽화로 경력을 시작했고, 그의 맥없는 입체주의는 피카소나 브라크처럼 분석적이라기보다 로제 드 라 프레네풍으로 삽화적이다.

뒤샹은 자신의 한계를 자각했거나, 아니면 자신의 진정한 관심이 다른 곳에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가 경멸조로 말했던 '망막적' 회화가 아니라 두뇌적 예술 말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아이디어의 인간이었다. 이 점에서 그의 첫 발명품은 레디메이드, 즉 예술작품으로 제시된 일상 상품이었다. 1913년 그는 자전거 바퀴를 포크째 나무 의자에 부착했다(그는 바퀴가 도는 걸 보는 게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혁신은 같은 해 더 중대한 사건에 가려졌다. 모더니즘 미술을 미국에 소개한 뉴욕 아모리쇼에 출품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2번)〉가 전시의 '스캔들적 성공'이 된 것이다. 언론의 조롱을 받으며 이 작품은 뒤샹을 작은 유명인사로 만들었고, 동시에 예술을 양식적으로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시사했다. 1915년 장기 체류를 위해 뉴욕으로 건너갔을 때, 이 악명과 이 사고방식 모두가 그에게 유용했다.

그의 가장 악명 높은 레디메이드 〈샘〉은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 전시에 등장했다—아니, 정확히는 등장하지 않았다. 우리는 원본을 그의 친구 앨프리드 스티글리츠가 찍은 사진으로만 안다. 뒤샹은 상점에서 소변기를 사서 'R. Mutt'라는 가명으로 서명하고, 90도 돌려 좌대 위에 예술작품으로 올려놓았다(한 논평자는 이를 '욕실의 부처'라 불렀다). 모든 출품작을 받겠다고 공약했던 전시위원회는 거부를 표결했고, 뒤샹은 항의의 표시로 사퇴했다. 또 한 번의 거부, 또 한 번의 스캔들, 또 한 번의 승리였다. 훗날 뒤샹은 자신이 '시각적 무관심', '완전한 마취 상태'에서 레디메이드를 골랐다고 주장했지만, 이 작품만큼은 명백히 아방가르드적 방식으로 충격을 의도한 것이었다. 표절 혐의에 대해 뒤샹은 3인칭의 가면을 쓰고, 소변기가 예술인 것은 '그가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응수했다—20세기 문화에서 운명적인 선언이었다. 그리고 부도덕하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소변기란 일상의 가구일 뿐이라고 받아쳤다. 게다가 그는 덧붙였다. '미국이 내놓은 유일한 예술작품은 배관과 교량뿐이다.'

이 긴장—저자성에 대한 비판(누구나 레디메이드를 살 수 있다)과 권위의 주장(오직 예술가만이 그것을 예술로 지명할 수 있다) 사이의 긴장—은 뒤샹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샘〉에 이르는 길에서 그는 이미 1914년작 〈초콜릿 분쇄기(2번)〉 같은 도해적 이미지로 (기계 제도는 산업 제조를 대비해 리세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것이었다), 그리고 1미터 길이의 실 세 가닥을 1미터 높이에서 떨어뜨려 떨어진 모양 그대로 고정한 우연성 작업 〈세 개의 표준 정지〉(1913-14)로 통념적 예술가상에 도전한 바 있다. 〈샘〉 직후 뒤샹은 또 다른 방식으로 저자성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로즈 셀라비(Rrose Sélavy, 프랑스어로 발음하면 '에로스, 그것이 인생'으로 들린다)라는 여성 분신을 발명해 이후 여러 작품의 저자로 내세운 것이다. 여기서 뒤샹은 예술의 제작에는 항상 성적 차이가, 그 감상에는 성적 욕망이 작동한다는 것을 암시했는데, 이는 미적 관조가 무관심적이어야 한다는 칸트적 요구뿐 아니라 마취적 무관심이라는 그 자신의 포즈와도 어긋난다. 1919년 모나리자 복제화에 콧수염과 염소수염을 낙서한 전용(détournement) 작업에서도 뒤샹은 차이와 욕망을 부각했다. 그 제목 〈L.H.O.O.Q.〉는 프랑스어로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처럼 들린다.

뒤샹은 이 모든 관심사를 첫 번째 대작, 〈큰 유리〉로도 알려진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에 집약했다. 1915년부터 1923년까지 공들인, 두 장의 유리판으로 된 9피트 높이의 작품이다. 작품을 위한 노트는 그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주제는 그의 입체-미래주의 회화에서 직접 이어진 것이다. 미술사가들은 〈큰 유리〉의 주해에 경력 전체를 바쳐왔는데, 뒤샹은 1920년대 말경 운송 중 작품이 깨지자 이를 '결정적으로 미완성'이라고 선언했다. 요컨대 작품은 두 개의 분리된 구역으로 이루어진다. 위쪽은 곤충 같은 형태로 환기되는 신부의 구역이고, 아래쪽은 여러 기계장치로 재현되는 독신자들의 구역이다(〈초콜릿 분쇄기〉도 여기 재등장한다). 세 개의 창백한 직사각형이 수평으로 늘어선 곳에서 '오르가즘적으로 만개하는' 신부는 독신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독신자들은 자위적으로 갈기만 한다. 욕망은 좌절 혹은 결핍에서 태어난다는 프로이트적 테제에 부합하는 알레고리로, 곧 수많은 초현실주의 오브제에서 탐구될 주제였다.

뒤샹은 PMA에 소장된 〈에탕 도네(주어진 것들)〉에서 이 아이디어로 돌아왔다. 1946년부터 1966년까지 비밀리에 제작해 1968년 그의 사후에야 공개된 작품이다. 미술관 깊숙한 곳에서 관람자는 (뒤샹이 스페인에서 가져온) 낡고 풍화된 큰 문에 다가서는데, 두 개의 구멍을 통해 가스등을 든 채 풍경 속에 사지를 벌리고 누운 머리 없는 여성 마네킹의 디오라마가 드러난다. 이 원근법적 장치에서 우리의 시점은 그녀의 소실점—그녀의 음부—과 일직선을 이룬다. 뒤샹은 관람자가 언제나 관음증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혹은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훗날 표현했듯, 'Con celui qui voit'('보는 자가 곧 보지[con]다').

〈큰 유리〉 이후 뒤샹은 침묵에 들어갔다—혹은 그런 척했다—그리고 체스로 돌아서서 곧 마스터 등급에 올랐다. 이는 한편으로 예술로부터의 휴지였고(로즈 셀라비로서 그는 광학 연구에 몰두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 제작을 전략적 수의 게임으로 재정의하는 일이었다. 이즈음 그의 경력에는 하나의 패턴이 자리잡았다. 공적 스캔들과 사적 프로젝트 사이, 미술계로부터의 급작스러운 철수와 또 다른 모습으로의 갑작스러운 복귀 사이의 왕복운동. 양차대전 사이 망명자로서 주로 파리와 뉴욕을 오가다 2차대전 후 뉴욕에 최종 정착한 뒤샹은, 자기 작품과 브랑쿠시 같은 절친한 친구들 작품의 비정기적 거래상으로 생계를 이었다. 이동하는 인간이었던 그의 다음 주요 프로젝트가 자신의 이전 작품들의 미니어처 복제본으로 채운 작은 여행가방의 한정판이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정교하게 제작된 〈여행가방 속 상자(La Boîte-en-valise)〉(1935-41)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MoMA에 기증되었을 때 이 작품은 '뒤샹 여행가방, 속임수 상자'라고 야유조로 기록되었다. 더 명민했던 것은 뒤샹의 위대한 후원자 월터 아렌스버그가 그에게 보낸 메모였다. '이것은 마리오네트 공연으로 펼쳐진 일종의 자서전이다. 당신은 당신 과거의 인형술사가 되었다.' 속임수 상자이자 인형극인 〈발리즈〉는 또한 한 예술가의 미니 미술관으로서, 자신이 비추는 바로 그 제도를 조롱한다.

MoMA에서 〈발리즈〉의 자료들은 진열장으로 가득한 전시실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며 전시의 중핵을 이룬다. 이는 〈큰 유리〉를 뒤샹 작품세계의 중심으로 보던 해석으로부터의 또 하나의 이동이다(〈큰 유리〉가 붙박이로 있는 PMA에서는 다시 되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전시와 도록 모두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제도인 미술관, 무엇보다 MoMA와 PMA에 대한 그의 직접적이고 깊은 관여'에 몰두한다. 아렌스버그는 1950년 자신의 뒤샹 소장품을 PMA에 기증했고, 또 다른 위대한 뒤샹 후원자 캐서린 드라이어는 1953년 소장품 여섯 점을 MoMA에 기증했다. 뒤샹은 PMA 기증은 비교적 수월하게 협상했지만 MoMA와의 관계는 다소 껄끄러웠다. 그는 관장 앨프리드 바의 '악의적 무능'을 불평했는데, 정작 바는 일찍이 1936년부터 뒤샹 개관전의 아이디어를 띄웠고, 같은 해 MoMA는 기념비적 전시 《환상미술, 다다, 초현실주의》에 뒤샹 작품 열한 점을 포함시켰다.

2차대전 후 뒤샹은 뉴욕 미술계에서 추앙받는 존재였고, 특히 케이지, 커닝햄, 라우션버그, 존스의 서클에 자상한 조언자였다. 이들은 추상표현주의의 순수회화에 맞서는 네오아방가르드의 대안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뒤샹의 밀폐적 예술을 자신들만의 퀴어 코드로 삼았다. 뒤샹에 대한 관심의 부활은 그의 작품, 특히 레디메이드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이어졌지만, 그가 공급을 빡빡하게 관리한 탓에 물량은 희소했다. 결국 뒤샹은 두 차례의 레플리카 제작에 동의했다. 첫 번째는 1960년 스웨덴 큐레이터이자 비평가 울프 린데가, 두 번째는 1964년 이탈리아 딜러이자 저술가 아르투로 슈바르츠가 맡았다. 전자보다 후자에 더 깊이 관여했지만(그 결과 후자가 더 정밀하다), 뒤샹은 둘 다 공인했다. 저자성을 둘러싼 그의 오랜 유희의 또 한 번의 반전이자, 이번 전시 큐레이터들의 또 하나의 초점이다. (전시가 연대기적으로 배치된 탓에, 일부는 천장에 아름다운 오브제처럼 매달린 레디메이드 레플리카 전시실이 후반부에 등장하는데, 초판들이 1910년대 것임을 생각하면 의외다.)

무엇보다 레플리카들은 최초의 두 뒤샹 회고전—1963년 패서디나미술관, 1966년 테이트갤러리—을 위해 필요했다. 패서디나 개막식에는 앤디 워홀과 에드 루샤 같은 젊은 팝 아티스트들이 몰려와 뒤샹을 수호성인으로 추대했다. 또 다른 팝 계열 인물로 뒤샹의 캘리포니아행에 동행했던 리처드 해밀턴은 테이트 전시를 위해 〈큰 유리〉 재구축에 수년을 바쳤고, 뒤샹이 작품 제작 중에 작성한 '그린 박스' 노트의 '타이포번역' 작업에도 협력했다. 뒤샹은 해밀턴의 재구축본에 'Pour copie conforme'(원본 대조필)이라고 서명함으로써, 레디메이드로 시작해 레플리카로 심화된 원본과 사본의 대립에 대한 교란을 이어갔다. (이 대립의 해체는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과 결부되지만, 이미 1960년대에 작동하고 있었다. 〈여행가방 속 상자〉에서 시작된 이 모든 복제물들은 산업적 생산과 수공예적 제작의 대립 또한 흐트러뜨렸다.) '레플리카들은 미술관을 동요시켰다'고 큐레이터들은 쓴다. 절제된 표현이다. 많은 뒤샹 추종자들(가령 1970년대 '제도비판'과 결부된 작가 다니엘 뷔렌)은 레플리카를 배신으로 낙인찍었다. 정작 뒤샹은 특유의 아이러니로, 레플리카가 레디메이드에게 '그들이 잃어버렸던 반복의 자유'를 되찾아주었다고 논평했다. 같은 풍자적 어조로 해밀턴은 뒤샹이 '그의 본질적으로 예술가적인 천재'가 '그를 패배시키도록' 허용했다고 평했다.

비판자들이 보기에 뒤샹은 미술관만이 아니라 시장에도 굴복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언제 그 둘의 바깥에 있는 척이라도 했던가? 뒤샹에게는, 보아하니, 이 부르주아 시스템들에 대한 대안이란 없었고, 애초에 그것들은 분리된 영역에서 작동하지도 않았다. 사실상 미술관은 그의 매체였고(큐레이터들의 표현으로는 그의 '시험장, 대립항, 파트너, 그리고 궁극적으로 집'), 시장은 그의 환경이었다. '진열창의 심문'을 암호처럼 언급하는 〈큰 유리〉의 초기 노트에서, 뒤샹은 예술 오브제가 다른 상품들과 함께 유통되며 유사하게 물신적인 욕망을 촉발한다고 시사한다.

이 입장은 큐레이터들을 수사적으로 곤란한 자리에 놓는다. 그들에게 뒤샹은 아방가르드로—즉 위반적이지는 않더라도 비판적인 존재로—집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랬는가? 그의 첫 전기작가 로베르 르벨은 그를 '타고난 반골'이라 불렀는데, 이는 싱거운 평가다. 조금 더 강한 것은 화가 로버트 마더웰의 판단이다—그의 앤솔러지 『다다 화가와 시인들』(1951)은 이런 인물들을 전후 영어권 세계에 복권시키는 데 일조했다—뒤샹은 '자기 작품이 반드시 미술관에 안착하도록 만든' '위대한 사보타주꾼'이었다는 것. 이는 공모의 혐의라기보다 영악함의 인정이다. 뒤샹은 '예술 게임'을 깎아내리면서도 그것을 멋들어지게 플레이했는데, 무엇보다 그 동네에 다른 게임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용적 시각은 뒤샹에서 한스 하케에 이르는 제도비판적 예술에 대한 수정된 이해와 궤를 같이한다. 즉 미술관과 시장 양자에 대한 위반이라기보다 그들과의 협상으로, 이 시스템들에 의한 불가피한 회수라기보다 그 내부에서의 제한적 변형으로 보는 이해 말이다. 이는 또한 뒤샹의 미술 자문, 전시 디자이너, 복제물 제작자, 홍보가, 아키비스트로서의 역할을 부각하는 최근 연구—엘레나 필리포비치의 『마르셀 뒤샹의 외견상 주변적인 활동들』(2016)이 대표적이다—와도 맥을 같이한다.

아니면 뒤샹을 그저 댄디로 볼 수도 있다. 보들레르가 「현대 생활의 화가」(1863)에서 상술한 조건에 그는 확실히 들어맞는다. 그의 매력은 전설적이었다. 그에게는 '냉담한 분위기' 뒤에 '잠재된 불꽃'을 감춘 '실직한 헤라클레스'의 무심함이 있었다. 그는 '결코 놀라지 않으면서' '남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저속화의 시대에 귀족을 연기했다(그는 자신이 그저 호흡자respirateur, 숨 쉬는 자일 뿐이라고 말하길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순들(레디메이드 레플리카가 제기한 모순 같은)을 즐거워했는데, 글쎄, 해결할 수 없다면 즐기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댄디는 20세기 미술에서 중요한 계보를 갖지만, 그 정치는 도발에 국한되고 그 후세에 대한 믿음은 (유무를 막론하고) 갈채에 의존한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보다 그토록 강한 채로 있도록 허용되어선 안 된다'고 뒤샹은 1915년에 말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묻게 하라')와 기이하게 가깝다. 40년 후 그의 견해는 달라져 있었다. '당신의 진정한 관객을 위해 50년이고 100년이고 기다려야 한다. 나의 관심을 끄는 관객은 그들뿐이다.'

그렇다면 뒤샹은 이 전시를 어떻게 보았을까? 1960년대의 회고전들이 거의 사후적(posthumous)이었다면, 이번 전시는 거의 사후-사후적(post-posthumous)으로 보인다. 달리 말해, 다시 한번, 그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 그의 묘비명은 이렇다. '게다가,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이다.' 떠난 지 오래이나, 뒤샹은 살아 있다.

번역 메모 몇 개: 'Con celui qui voit'의 con은 프랑스어 비속어로 여성 성기와 '멍청이' 둘 다를 뜻하는 중의어라 원문의 노골성('He who sees is a cunt')을 한국어로 온전히 옮기기 어려워 절충했습니다. 〈Three Standard Stoppages〉는 국내 문헌에서 〈세 개의 표준 정지〉 외에 〈표준 정지 장치〉로도 옮겨집니다. 'détournement'은 상황주의 용어 관례대로 '전용'으로 처리했습니다.

2026년 6월 9일 화요일

참교육

 참교육을 보고 자칭 진보좌파들이 폭력의 정당화를 우려하고 나섰다. 아무리 요즘 애들 다루기 힘들다 하더라도 교실 선진화 전 폭력이 난무하던 미개 상태로 돌아가는 건 퇴행이라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드라마나 코미디나 이런 대중극이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건 광범위한 공감대다. 공감대가 만약 성립하지 않는다면 제작조차 시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후관계가 잘못되었다. 이런 영상물 때문에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폭력이라도 돌아오지 않으면 도무지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현실 감각이 동시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봐야 더욱 정확할 것이다. 미디어비평가 중 몇이 말한다. 그러니까 이런 극은 조심해야한다고. 대중들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콘텐츠는 나쁜 콘텐츠이므로 비판해야 한다고. 내 생각은 당신 말이 틀리지 않았다. 다만 틀리지는 않았을 뿐이다.

예술가와 표현의 자유

 “이혼이나 당하고” 발언에…이승환, 윤서인에 5000만원 손배소 | 중앙일보

진보적 가수와 보수적 만화가가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붙었다. 가수는 표현의 자유가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화가는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현의 자유란 명제는 어떤 면에서 맥락적 무기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 말이 소환되는 순간은 언제나 억압받는 쪽이 생겼을 때이고, 결국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포지션의 문제에 불과할 때가 많다.

표현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은 사회의 유지 관리 차원에서 대두된다. 하지만 변혁의 국면에서 무제한적 표현은 진보의 무기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무기를 빼앗으려다 우리 무기도 내던지는 모양새도 어리석다. 권력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작은 세력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보기에 이승환은 무언가를 변혁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법과 원칙이 존재하는 리버럴한 세계, 곧 상식적인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 반면 윤서인의 세계는 무언가 상식적이지 않다. 무언가 불만이 쌓이는데 해결은 안 되니 열이 받고 화가 나고 세계가 잘 못 된 것 같은데 나와 상관없이 세계는 잘 돌아가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것은 화를 내고 조롱하고 욕을 한다.

2026년 6월 5일 금요일

선거가 끝나고

TK 지역 청년과 이야기해보면 이들이 '팩트'라고 부르는 정보 분자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정보 원자와는 다른 단위의 객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