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8일 목요일

시간의 전시

백남준에게 불확정적인 음악은 불충분한 음악이다. 불확정적 음악에서 불확정성에 호소할 자유를 가진 자는 오로지 연주자다. 관객은 음악을 듣거나 듣지 않거나 하는 자유밖에 없다. 이는 고전 음악에서 관객이 누리던? 자유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런 음악은 선형적인 시간을 가진다. 그러니까 관객은 연주자와 같은 참여를 음악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1961년에 나는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의 초안을 완성했다. 여기에서 관객은 마음대로 방을 옮겨 다니며 적어도 20개의 다른 소리를 선택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시간은 필연적으로 음악-공간(음악-홀)으로 귀착되는데, 그 이유는 자유로운 시간에는 두 개 이상의 매체(방향)이 필요하고, 두 매체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공간(홀)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홀(공간)은 단지 소리의 풍요로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 필수불가결한 '더 나은 절반'이 된다. (이것은 예를 들어 귀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는 식의 현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좀 더 강한 불확정성으로 향하는 다음 단계로서 나는 관객이 (혹은 이 경우에는 대중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즐기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곡의 연주를 포기했다. 나는 음악을 전시한다. 나는 방에 각종 악기와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물을 전시해서 관객이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게 한다. 나는 이제 요리사(작곡가)가 아니라 'feinkosthandler'(세련된 식품가게 주인)일뿐이다." <음악전시회>, <<말에서 크리스토>>, pp. 369-70.

이 인용에서 백남준은 자유로운 시간을 관객에게 선사하기 위해서 두 가지 매체가 필요하다고 했다. 백남준의 의도는 한 매체가 하나의 방향을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이상의 매체를 통해 선형적 시간을 뒤섞는 것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공간"으로 귀착된다. 이 공간은 소리의 절반으로, 백남준이 쓰기론 현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차원에서 그렇다.

시간을 공간화하려는 실험은 1960년대와 70년대 미디어 인스톨레이션 예술에서 활발하게 이뤄졌다. 또한 60년대에는 미니멀리즘에 의해 모더니즘 조각의 초월론적 시공간이 질문에 붙여지고 있었다. 미니멀리즘은 후기(성기) 모더니즘과의 단절인과 동시에 위반적 아방가르드, 그 중에서도 뒤샹식의 다다와 구축주의의 복귀를 동시에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이 특수하게는 레디메이드 패러다임의 복귀이며 일반적으로는 미술제도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공격이라는 인식은 미니멀리즘의 옹호자와 반대자를 막론하고 공히 직관되었는데, 내가 여기서 발전시키고자 하는 요지도 바로 이것이다." 할 포스터, <<실재의 귀환>>,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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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로스Christine Ross는 초기 비디오아트가 시간 만들기making time의 양식을 실험하는 데 가장 이해도가 높았다고 썼다. 그에 따르면 비디오라는 미디엄은 비쥬얼 아트에서 선형적 시간성과 그 시간의 지배적 관습성을 교란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었다. 백남준은 시간의 전시, 다음 단계로 관객에 관심을 가졌다. 연주를 포기하고 관객이 자유롭게 행동하길 바랐다. 이런 의식적인 시간의 전시에 대한 실험은 구조주의 영화 제작자에게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2017년 12월 27일 수요일


노큐레이터

능력에 비해 과도한 주목을 받으면 이렇게 된다. 과대포장하지만 공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여한 큐레이터가 뭔 덕을 보려고 이러나 싶기도 했다. 

하나의 풍경. 보다 더 신 세대로 권력이 이동했지만 정작 신 세대는 구 세대의 능력이 필요하다. 

2017년 12월 21일 목요일

메갈리안은 페미니스트일까

"메갈리아·워마드를 페미니즘의 한 유형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http://realnews.co.kr/archives/8113

메갈은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내 생각에 메갈은 특수한 형태의 페미니즘이다. 유치하게 비유하자면 인과역전의 쿠 훌린의 창[1]처럼, 페미니즘 의도와 사상을 가져서 페미니즘인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적 효과가 먼저 발휘되고, 그 다음 역으로 원인이 페미니즘이 되어버린 페미니즘이다. 이것은 당시 메갈/지지자들의 극단적인 실용주의가 잘 대변한다. 이런 부류는 지도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동그라미 안쪽이 실질적으로 변한다면 동그라미 바깥을 어떤식으로든 이용하든 무시하든 왜곡하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1] 페이트/스테이나이트에서 쿠 훌린의 보구인 게이볼크는 상대의 심장을 꿰뚫는다는 약속된 결과를 미리 정해놓고 창을 던진다. 그래서 그 일격은 피할 수 없다. 백발백중의 필살의 보구.

페이트 스테이나이트에서 쿠 훌린은 인과역전, 반드시 상대방(아처)을 죽이게끔 약속된 절차 가운데서도 상대방이 죽지 않은 그 시점에서 패배를 인정하며 물러난다. 그러니까 애니로 치면 어떤 부작용, 강력한 악마와 계약을 하고 현실법칙을 무시한 결과를 냈기 때문에 그 대가를 지불해야한다던가, 혹은 강력한 저주를 성공하지 못했을 때 역으로 술자에게 저주가 돌아온다던가 하는 상황이 메갈이 맞은/을 상황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긍정도 부정도 할 필요는 없다. 메갈이 죽는다고 페미니즘이 죽는 건 아니며 메갈이 죽는다고 메갈이 일궈냈던 많은 것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2017년 12월 20일 수요일

킬라킬 (2013-4)


어우, 난해한 애니였다. 적어도 애니에서만큼은 파먹을 과거가 일본에 많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