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후 게재 받은 논문을 꾸역꾸역 수정해서 보냈다. 제대로 수정했는지 모르겠다. 석사논문을 쓸 때는 지도교수라는 방패막이 있었는데, 지금은 횡한 느낌이다. 이건 내가 아직 심사자의 수준이 어떤지 몰라서 극단적으로 그 수준을 높게 잡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트씬에 올린 글이 페북 타임라인에 공유됐다. 오랫만에 느끼는 판옵티콘이랄까. 관종의 기운이 살아난다고 해야하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누가누가 그 글을 보고 공유하는지 궁금해진다. 그것 때문에 논문 수정에 집중하지 못하고 백퍼센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대충 떼워서 보냈다. 젠장. 하지만 내 그런 성향은 어떤 면에서 상수다.
아무튼 두 글을 보내고나니 좀 후련하달까. 그런 기분이 든다. 학술지 논문은 말하자면 내가 석사논문에서 진짜로 하고싶었던 걸 그냥 마음대로 한 결과다. 아트씬 글은 개인적으로 부채 같이 느껴졌던 걸 풀어낸 결과다. 아무튼 좀 가벼운 마음. 그런데 앞으로 무슨 글을 써야 하나?
2019년 5월 26일 일요일
2019년 5월 25일 토요일
AI 포럼 짧은 후기
대전에 A.I. 포럼 때문에 다녀왔다. 영 밖에 안 나가다보니 먼 곳을 다녀오니 몸이 엄청 힘들다. 나도 질의자로 참여했고 앞으로 글을 쓸 테지만, 현시점, 인문학에서 A.I.를 다루는 것은 버겁다. 그것이 이번 포럼에서 내가 확인한 것이다. 세부 매커니즘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 학계와 현장 내부에서 어떤 연구가 진척되고 있는지는 더욱 모를뿐더러 현시점에서 그것의 적용은 아직 단순한 정도에 머물러있다. 인문학은 SF적 상상을 과거부터 다루어 왔다. 내가 보기에 여전히 상상적 상태가 아닌가 한다.
세 발제자 중 최소한 두 발제자는 요즘 유행하는 사변적 실재론에 공통적인 합의를 보였다. 대략 요약하자면, 첫째 thing을 향한 호기심, 둘째, 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과학기술의 사용, 셋째, 이때 과학기술은 쓸모있음보다는 없음을 추구, 말하자면 무관심적인 사용이다. 에얼리언 같은 존재(자)와의 정념적 관계 맺기.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실재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실재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 열광한다.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은 물질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휘저을 때에 그것이 보여주는 특정하고 고유한 형태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나만 여기에 시큰둥했을까. (어떤 면에서 이들은 실패한다. 실재를 재현하려고 하기에.)
세 발제자 중 최소한 두 발제자는 요즘 유행하는 사변적 실재론에 공통적인 합의를 보였다. 대략 요약하자면, 첫째 thing을 향한 호기심, 둘째, 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과학기술의 사용, 셋째, 이때 과학기술은 쓸모있음보다는 없음을 추구, 말하자면 무관심적인 사용이다. 에얼리언 같은 존재(자)와의 정념적 관계 맺기.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실재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실재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 열광한다.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은 물질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휘저을 때에 그것이 보여주는 특정하고 고유한 형태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나만 여기에 시큰둥했을까. (어떤 면에서 이들은 실패한다. 실재를 재현하려고 하기에.)
2019년 5월 22일 수요일
Naum Gabo, Antoine Pevsner 중에서
구축주의 예술가가 겨냥한 것은 “진짜 현실의 선명한 비전”을 주는 것이었고, 때문에 이 목표는 본질적으로 미학적 활동이 아니라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과학의 객관성(objectivity)와 예술의 창조성(creativity)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하나는 “정보(inform)를 주려고” 하며, 다른 하나는 “즐거움(please)을 주려고” 한다. 예술작업에 의해 제공되는 즐거움은 감정의 탐닉이나 감수성의 채널을 취할 필요가 없다. 즐거움은 인식의 다양한 급으로부터 도출되며 순수한 즐거움은, 내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관점에 따르면, 지적이면서도 (동시에) 감성적이다. 이런 가장 정제된 즐거움의 급은 오직 훈육된 노력을 향한 응답에서 주어진다. 이런 예술의 훈육은 a) 구축 기술(skill) b) 선택적 관찰 c) 통합적 비전이다. 기술과 관찰은 모든 유형의 예술에서 필수적이며 그 효과에서 예술 작업들은 질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다. (가보가 실천한 관찰은 레오나르도나 콘스터블이 싶언한 관찰과 다르지 않다.)
Herbert Read, "Introduction," Naum Gabo, Antoine Pevsner,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48,) exhibition catalogue, p. 11.
Herbert Read, "Introduction," Naum Gabo, Antoine Pevsner,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48,) exhibition catalogue, p. 11.
2019년 5월 13일 월요일
노키즈존에 관해
앞으로 내가 아이를 가지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노키즈존이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점점 느끼고 있다.
정지우가 페이스북에 쓴 노키즈존에 대한 글이 화제다. 정지우는 노키즈존이 차별인 이유는 업주가 조폭이나 시끄러운 중년남녀는 제지하지 못하지만, 아이정도는 제지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권한을 행사한 것에서 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선택적인 권력 행사는 그 자체로 차별이 이미 이데올로기적 구조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여기서 정지우는 정신 장애아나 치매 환자의 보호자는 그들이 공공장소로 나갔을 때 죄인으로 인식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그 정도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장소로 나가긴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둘은 동급이다. 정지우가 보기에. 그리고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회는 정상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이 뭔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노키즈존으로 가게를 운영하는 업주 개인에 대한 비판인지, 아니면 노키즈존이라는 담론에 대한 비판인지. 이 둘은 물론 포개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업주 개인에 대한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글을 시작해서 사회 비판으로 끝 맺는 것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종류의 글은 개인에서 사회로 옮아가는 과정을 아무 설명없이 뭉갠다. 개인에 대한 비판이 곧 바로 사회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것을 스리슬쩍 가능하도록 만드는 논리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특수를 위해 보편을 이용한다. 그러기 위해서 특수는 마치 보편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 경우 특수는 마치 보편인 것처럼 다루어진다. 비판을 위해.
이런 논리적 비약이 이 사회 어디서나 발견된다. 특히 페미니즘 담론에서 특정한 개인의 잘못이 남성 전체의 잘못으로 비약하거나, 담론 비판이 특정한 개인에게 내다 꽂힌다. 후자의 경우 특히 위험한데, 조민기나 성재기 등이 자살하더라도 이데올로기적 마취 상태에 빠져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한 사람을 자살로 내모는 데 일조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는다고 면죄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언젠가 죗값을 받으리라.
정지우가 페이스북에 쓴 노키즈존에 대한 글이 화제다. 정지우는 노키즈존이 차별인 이유는 업주가 조폭이나 시끄러운 중년남녀는 제지하지 못하지만, 아이정도는 제지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권한을 행사한 것에서 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선택적인 권력 행사는 그 자체로 차별이 이미 이데올로기적 구조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여기서 정지우는 정신 장애아나 치매 환자의 보호자는 그들이 공공장소로 나갔을 때 죄인으로 인식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그 정도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장소로 나가긴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둘은 동급이다. 정지우가 보기에. 그리고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회는 정상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이 뭔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노키즈존으로 가게를 운영하는 업주 개인에 대한 비판인지, 아니면 노키즈존이라는 담론에 대한 비판인지. 이 둘은 물론 포개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업주 개인에 대한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글을 시작해서 사회 비판으로 끝 맺는 것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종류의 글은 개인에서 사회로 옮아가는 과정을 아무 설명없이 뭉갠다. 개인에 대한 비판이 곧 바로 사회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것을 스리슬쩍 가능하도록 만드는 논리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특수를 위해 보편을 이용한다. 그러기 위해서 특수는 마치 보편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 경우 특수는 마치 보편인 것처럼 다루어진다. 비판을 위해.
이런 논리적 비약이 이 사회 어디서나 발견된다. 특히 페미니즘 담론에서 특정한 개인의 잘못이 남성 전체의 잘못으로 비약하거나, 담론 비판이 특정한 개인에게 내다 꽂힌다. 후자의 경우 특히 위험한데, 조민기나 성재기 등이 자살하더라도 이데올로기적 마취 상태에 빠져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한 사람을 자살로 내모는 데 일조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는다고 면죄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언젠가 죗값을 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