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용접공으로 이름났던 천현우가 「지방총각들도 가정을 꿈꾼다」라는 글을 써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1) 이 글은 무엇보다 좌파의 빈축을 샀다. 좌파에게 ‘지방’은 구출되어야 하는 중앙의 식민지다. 반면 ‘총각’은 요즘 같아서는 ‘처녀’만큼이나 불러서는 안 되는 혈기 왕성한 구시대적 남성 주체의 형상이다. 지방과 총각은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두 단어 같다. 마치 피해자와 가해자처럼.
왠지 모르게 나에게 천현우가 묘사한 지방 총각의 가정을 향한 소박한 욕망은 지방 예술공간의 알레고리처럼 보였다. 지방에 여성이 없는 이유는 제조업 위주의 산업 구조 때문에 일자리가 없기 때문인데, 마찬가지로 이런 조건에서, 문화계통의 일자리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또한 인구수 자체가 적거나 감소하다 보니 이성끼리 만날 기회도 적다고 하는데, 미술 관련 학과가 신속하게 통폐합되고 있는 와중에 미술 인구 역시 턱없이 적으며, 야심에 찬 예술가나 큐레이터, 이론가가 언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둘러보면 지방을 떠난 지 오래다. 또한 혼인에 성공해도 아이를 낳기도 힘들며, 맞벌이 부부를 위한 지원책이 미비한 지방에서 아이를 키우기가 난망하다고 하는데, 이는 지방의 문예 지원 상황과 흡사하다. 문예 지원이 지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원 규모도 중앙에 비해 턱없이 적은 데다가 지원 방향성도 효용성 중심으로 미묘하게 다르다.
지방에서 예술공간을 운영한다는 것은 마치 남아 있지 않은 이성을 상상하고, 구애하고, 또 가정을 꾸리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한 것 같다. 기획전 《점이지대》가 펼쳐진 사랑농장은 바로 이런 조건 위에 놓였다. 사랑농장이 위치한 경남 김해시 한림면은 소멸하는 지방 중에서도 ‘초토화된 마을’로 불리곤 한다. 한 보도에 따르면, 2017년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이 서울과 제주를 제외한 전국 읍면동의 개별입지 공장 수, 오염부하를 토대로 6개 등급을 나눈 결과 한림면은 0등급을 받았다고 한다.2) 청년들은 모두 떠나고 노인이 어쩔 수 없이 남아서 버티던 중 예술가가 들어왔다. 돼지 사육 농장 한가운데, 어디선가 주워온 영문자 LOVE 간판을 걸면서.
사랑농장이 이러저러한 작가를 모아서 표방한 ‘점이지대’는 여기서부터라고 제안한다. 보통의 기획전에서 제목은 아이디어를 총괄하기 마련이다.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고도로 정밀하고 적확하게 세공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점이지대》는 특정한 예술 작업의 흐름을 제시한다든지, 어떠한 미학적 주제로 작품을 묶어내려는 시도에 관심이 없다. 전시는 작가도 예술도 아닌 어떤 장소의 성격, 비결정적인 상태만을 표현한다. 중요하게도, 그 장소란, 예술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사랑농장’ 그 자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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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이, 한림면은 김해에서도 주변적인 장소로 대중교통으로 방문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차를 운전해서 가면, 지나가면서 볼거리라는 것이 헐겁게, 바람 불면 날아갈 것처럼 만들어진 공장 단지다. 인적은 거의 없고 돼지 사육장이 근처에 많아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차를 운전해 올라가면 예술가스럽게 보이는 사람들 몇몇이 서성이고 있다. 이것이 설마 예술공간일까 싶은, 방치된 듯한 샌드위치 패널 공장이 바로 사랑농장이다. 전시장은 어두침침한데 비단 조명시설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무언가 쾨쾨하고 무언가 텅 빈, 무언가 예쁜 구석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하고 빈곤한,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안 좋은 공기가 감도는, 하루만 전시해도 장비는 고사하고 작품이 다 망가질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감돈다.
그런 곳에 예술가의 작품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두 개의 불길한 신호가 감지된다. 하나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장해서 앞으로 치고 나가자면, 샤로수길, 망리단길, 송리단길이라는 미래. 젠트리피케이션은 오늘날 낯선 현상이 아니며, 어떤 면에서, 지방소멸 시대에, 모든 지자체는 살아남기 위해 “전국의 관광지화”를 바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 잘 알려진 것처럼, 문화요소, 특히 예술가는 가성비 좋은 젠트리파이어(gentrifier)다. 무언가를 효과적으로 변화시킨다. 스스로를 다른 것과 구별해내고 스스로 특별하게 존재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종국에 원주민을 내쫓을지라도, 예술가는 기어코 그렇게 한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여기의 예술가는, 또 한 무리의 젠트리파이어로서 한림면에 광범위하게 퍼진 폐급 공장만큼이나 암세포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예술공간의 잘 알려진 미래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면, 예술공간의 잘 알려진 과거는 지방소멸과 궤를 함께한다. 2014년 《공장미술제》의 작가 대우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출발한 젊은 ‘을’의 분노는 10년 전 386세대와 X세대가 온 힘을 다해 구축한 대안공간 시스템의 효용성 상실을 논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가 되면 공적영역의 문예지원 시스템이 안정화되면서, 신진작가 소개 자체만으로 특별할 게 없어진 시대에, 그렇다고 작품을 팔아줄 수도 없는 대안공간을 청년 예술가는 하나 둘씩 떠난다.4) 누군가는 쉽게 말하곤 했다. 포기하면 편하다. 능력 없으면 더 이상 민폐 끼치지 말고 문을 닫아야 한다고.
그런 면에서 보면, 돼지 농장과 샌드위치 패널로 둘러싸인, 제대로 된 전시장도, 큐레이터도, 행정 시스템도, 예산도 없는, 사람도 잘 찾지 않는, 알려지지도 않은 지방에서, 사랑농장이 예술공간으로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초강력 무리수 그 자체다. 죽음의 이지선다가 눈앞에서 강요된다. 변하면 죽는다: 젠트리피케이션. 변하지 않아도 죽는다: 지방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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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트리피케이션이 완성되면 예술가는 사라진다. 특별했던 예술실천은 도시 디자인과 소비 시스템에 잡아먹혀, 최악의 경우 거주민과 함께 쫒겨나며, 심지어 최선의 경우에도 예술가 마을 같은 낭만 어린 전형이 된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지 않아도 예술가는 사라진다. 예술공간이 별다른 지원책과 매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기피대상이 되어 사라진다면, 역설적으로 예술가는 활동할 근거를 출발 전부터 상실한다.
혹시 문화관광의 소비경험 따위로 외파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종국에 예술가의 지지를 잃어 스스로 내파하는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자기의 특별함과 존재를 지켜나가는 만큼, “전국의 관광지화”의 완성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젠트리피케이션과 지방소멸 양극단과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그것과 멀어지려고 하는, 이중적 과제를 지닌, 그러니까 변화 그 자체를 지속할 방법이 있다면?
그런 생각지도 못한 기똥찬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 리가 만무하다. 사실, 《점이지대》는 어디서나 들려오는 노래를 놀랍도록 성실하게 따라 부른다. 부산과 울산 같은 인근 지역의 작가들이 폐공장 지대에 모였다. 작품을 설치하고 SNS에다가 홍보한다. 나름의 오프닝을 하고 나 같은 큐레이터나 비평가를 초대해 멘토링이란 이름의 세미나도 연다. 사진을 찍고 글을 받고 결과보고집을 출간하고 문서고에 꽂아 놓거나 누군가에게 보낼 것이다: 홍티아트센터나 F1963 같은 많은 기관의 프로그램이 답습하고 있는 프로토콜.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2020년대에는 전형을 이룬다. 백종원 거리를 모든 지자체가 만들려는 것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이 나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종국에 ‘똑같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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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영은 음습하고 외진 공간에 사람들을 모으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 영상 전시를 여는 것이 유효하겠다고 생각했다. 반지하 주택의 창문을 사랑농장의 어두운 벽에 투사하기로 결정한 최은희는 사랑농장을 보면서 반지하의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전수현은 지방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합리와 비합리를 연결하는,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이단적 믿음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출품하기로 결정했다. 최서연은 마르크 오제가 일찍이 말했던, 전통적 공동체가 불가능해진 비장소적 이미지를 사랑농장이란 장소와 겹쳐보았다. 정수는 언어로부터 시각으로 나아가며, 김은지는 이미지로부터 언어를 향해 가며, 둘은 미학적인 분할과 미끌어짐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이 모든 영상과 설치물이, 허름하고 외진 건물 안에서,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흐트러짐 없이 성의 있게 설치됐다.
이상한 건, 지금, 여기서 그것을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발견적인 경험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가성비적 시대정신을 초과하는 경험으로 온다는 사실이다. 최선을 다해 만든 작품을 왜 굳이 여기에 출품하려고 결정한 것인지, 모두들 왜 이 멀고 지저분한 곳까지 와서 무알콜 맥주 캔을 손에 들고 흐느적거리고 있는 것인지, 누군가에게 말을 걸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인지, 왜 그렇게 작업대를 반듯하게 세워서 그 위에 빔프로젝터를 정중앙에 삐뚤어지지도 않고 올려놓은 것인지, 십시일반 돈을 모아 평론가를 잡아 놓고 추운데 밤새도록 집에 가지 않고 작업 이야기를 즐겁게 나눴던 것인지, 감기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마스크를 쓰고서라도 여기에 오고 싶었던 것인지, 그러니까 무엇이 그렇게 절박해서 왜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인지, 이 모든 것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다. 《점이지대》는 그런 장소였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과잉된 무엇이 여기에 투자되었다.
이런 각자의 충실성을, 이런 과잉을, 경남일보의 이정민 기자를 따라서 ‘예술혼’ 말고는 딱히 설명할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5) 이런 예술혼은 시작부터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의 예술공간이란 점을 떠올려 봤을 때 차고 넘치는 무엇이 아닐 수가 없다. 또한 문화적 키치를 만드는 젠트리파이어란 용기에도 채 모두 담길 수 없는 무엇일 테다. 예술혼이 구차다고 조롱받는 시대에, 예술공간이 작가 커리어의 지렛대로서 기능하지 않는다면 무가치해지는 시대에, 이름 없는 공간에서 행사를 만들고, 사람을 모으고, 여기에 충실히 화답하는 일련의 과정은, 심지어 그것이 이미 잘 알려진 배관을 따라 흐른다 하더라도, 압이 차서 팽팽 부풀어 오르고 찢어진 틈으로부터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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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서, 어쩌면 지방총각은 영원히 가정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혼을 못한다고 사랑을 못하는 건 아니다. 가난한 사람도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고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점이지대》는 예술가의 사랑농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관심 가져주지 않아도, 알 수 없어도, 가까운 미래에 이곳이 설령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우리가 모여 작업을 보고 이야기하고 웃고 떠드는 그런 꿈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런 장소, 그리고 그런 일을 앞으로도 계속 꿈꾸고 싶다는 희망. 《점이지대》는 사랑농장이 취한 그러한 종류의 태세로 보였다.
1) 천현우, 「[2030 플라자] ‘지방 총각들’도 가정을 꿈꾼다」, 《조선일보》, 2022. 9. 15.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09/15/IADOUZTNAVDMHHLXCYX6GOL6V4/ (접근: 2023. 1. 16.)
2) 윤지로, 「암세포 번지 듯…느슨한 규제에 공장은 마을을 집어삼켰다 [우리의 환경은 평등합니까]」, 《세계일보》, 2019. 3. 7.
https://www.segye.com/newsView/20190306004667 (접근: 2023. 1. 16.)
3) 앞으로 지칭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백종원과 예산군의 관계처럼 공공영역과 영합하는 지방재활성화 정책에 가깝다. OSEN, 「시장으로 간 백종원, ‘전국의 관광지화’ 새로운 바람 만들다」, 《조선일보》, 2022. 10. 04. https://www.chosun.com/entertainments/broadcast/2022/10/04/46WSM632H67IP2WDLR3KSWHS4Y/ (접근: 2023. 1. 17.)
4) 여기에 관해선 나의 「신세대 담론의 작은 역사: 2013-2016」를 볼 것. 《아트신》, 2019. 2. 12.
https://www.artscene.co.kr/1680#footnote_link_1680_3 (접근: 2023. 1. 17.)
5) 이정민, 「경계 넘나든 시선, 김해의 점이지대 작가 5人 예술혼」, 《경남일보》, 2022. 9. 29.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504777 (접근: 2023. 1. 17.)
2023. 1. 18.
사랑농장 <점이지대> 카탈로그 글로 쓰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