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5일 월요일

생산자로서의 비평가

비평가는 뭘 하는 인간일까? 보통은 칼과 저울을 들고 작품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는 생산자를 지향하는 룸펜 혹은 아나키스트이겠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나 또한 대부분 이런 포지션에서 작품을 보아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위치란 벤야민이 말하듯이 계급과 계급 사이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자리다. 안민욱이 내가 남에 대해선 쉽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을 한 것을 돌이켜보면 이런 오만한 나의 위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생산의 입장에서 비평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비평가가 하늘이 아니라 땅 위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진보적 생산자라면 분명히 당대 생산구조 속에서 내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고 어떻게 그런 기능이 수행되고 있으며 그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생산자로서의 저자에서 나오는 저자-부르주아-전문가-엔지니어의 모델이다. 내 식대로 이해하자면, 혁명을 위한 비평가의 기능성 중 가장 효율 좋은 것은 일종의 스파잉이다. 부르주아의 생산도구에 기생할 수밖에 없지만 이내 그것을 배신한다. 이 스파이는 부르주아의 생산도구를 프롤레탈리아트의 혁명 도구를 향해 진보하게 하는 기술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르주아적 전문가는 최상의 엔지니어가 된다. 

진보적 생산자로서의 비평가가 해야할 일은 그래서 프롤레탈리아트-작가와의 정신적 연대 같은 것이 아니다. 프롤레탈리아트와 동질화하려는 노력도, 어찌보면 부르주아와 거리를 두려는 노력도 무의미하다. 저자의 자리가 그런 자리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부르주아의 생산도구를 혁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도구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르주아 내부 진영에서의 구조적 투쟁이자 부르주아 외부 진영에서의 구조적 투쟁이다. 이로서 비평가는 이데올로기 후원자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때의 비평은 어쩌면, 아직은 이름 없는 기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벤야민이 주는 통찰은 간단하다. 글쓰기는 비평의 이름을 벗어 던지고 당대 생산관계를 뒤바꾸는 혁명을 위한 도구가 될 필요가 있다. 안민욱은 확대해서 말하자면 비평가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도구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무의식중에 내비쳤다. 그리고 오늘의 비평가는 일정부분 그런 식으로 주류 생산관계 속에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나는 그런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들과 거리를 두고 불가능한 자리에 서서 작가를 나무랐다. 하지만 벤야민에 비추어보자면 나는 결과적으로 그런식으로 비평의 권능을 재확인했거나, 혹은 어딘가에 있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 후원자가 되었다. 물론 그들이 잘한 건 아니지만 나 또한 이런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그 혁명적 도구성을 획득하기 위해 비평은 어떤 기술을 발전시켜야 할까. 이건 글쓰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에 어렵다. 

2018년 3월 4일 일요일

한나 아렌트

왓차플레이에서 감상했다. 다른 것보다 책으로만 본 지식인의 육신이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광경이랄까? 이런 걸 보는 건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비록 영화이지만. 거기서 아렌트는 밥도 먹고 연애도 하고 까이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하고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고 그러더라. 그러니까 그냥 사람이더라. 그리곤 우리나라에서 칼럼을 쓰고 비평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 또한 아렌트만큼 존경할만한 분들이라고.

2018년 2월 26일 월요일

김어준의 물타기

김어준이 옳냐 금태섭이 옳냐 이런 건 내 관심사가 아니다. 유일하게 내 관심을 끄는 건 김어준의 말이 가져온 효과이고 그것을 의도한 김어준의 감각이다.

이로써 미투 운동에 섞여 있는 진보 남성에 대한 (미래 시점의) 공격은 김어준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물타기 됐다. 그 가운데 김어준은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구설수에 대해 다 예상했다는 식으로 쿨하게 반응하며 진보 남성을 (자신을 포함하여) '약하게' 맥인다. 그야 말로 스스로가 백신의 역할을 한다는 것.

이것이 독이 될까 약이 될까? 어쩌면 미투 운동과 진보 진영 사이의 연합을 김어준이야말로 가능하게 해준다는 가설 또한 생각해볼 수 있다. 내 생각에 김어준은 스스로가 (약한) 까임의 대상이 됨으로써, 미투 운동의 불편한 존재, 진보 안의 마초이즘을 건드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지만, 전면 전쟁이 되지 않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스스로가 애매한 진보 음모론자란 점에서, 지금의 주류 진보는 도덕적 무결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큐피트일지도 모른다. 김어준은 진보이지만 진보가 까도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김어준은 스스로 까임을 자처함으로써 진보 (남성)과 미투 운동의 연대를 이끌어내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김어준의 발언은 굉장한 퍼포먼스다. 논리라기보다 사실 감각적으로 불쾌와 불일치를 만들어내며 그렇게 만들어진 틈에 하수구에 물이 빨려 들어가듯이 사람들이 휩싸이며 논쟁한다. 내가 보기엔 굉장히 미학적이며 정치적이다..랄까.

영화

왜 한국의 미술가는 영화를 하고 싶을까? 왜 조금 알려지기 시작하면 스텝과 배우를 고용하고 세트장을 만들거나 그에 준하는 연출을 하며 영화스럽게 작업을 하고 싶어할까? 그러면서 왜 리얼리티와 점점 더 거리를 두는 것일까?

사실 이건 작가뿐 아니라 대중적 정서인 것 같은데, 한국 컬링 국가대표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달라고 청원하며 이미 영화 포스터까지 나돈다는 사실...


현실을 영화로 보고 싶어한다. 거꾸로 영화를 곧 현실로 받아들인다. 한국인은 가상을 현실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조영남이나 이구영 같은 사태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신빙성 있는 이유일지도. 그러니까 영화를 하고 싶은 좌파 미술가들은 자신들이 영화를 하면서 리얼리티와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2018년 2월 24일 토요일

눈썹의 단상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는 작업이다. 하지만

작업에 흐르는 작가의 멘털리티는 확연히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선과 악을 나눠놓고, 섹스돌과 (비인간화한) 인간 모두에 거리를 두며, '가련한 그들'을 카메라 렌즈로 더듬는다. 얼빠진 노동자가 흉악스런 손놀림으로 섹스돌을 헤집어 놓는다. 마오의 초상이 언뜻 보인다. 똑같이 생긴 폴리곤 캐릭터를 샷건으로 쏘는 게임... 이런 요소 때문에 포드주의 비판의 전형이 순식간에 떠오른다. 더군다나 작가의 자리는 너무 안전하다. 이런 상황을 고독하게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 좀 더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휴머니즘을 옹호한다고 해도, 다른 걸 다 떠나서 나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 모든 작업이 이제 지겹다. 자신의 터질듯한 에고를 얼마간에 응축시켜놓고, 그걸 보라고, 알아달라고, 중요하지 않냐고, 대단하지 않냐고 떼를 쓰는 작업이 역겹다. 말로만, 영상으로만, 이미지로만 정의를 떠드는 정의 속물이 너무 싫다. 영상에 보여지는 노동자는 그야말로 얼빠진, 무기력한, 반복 노동을 일삼는 자다. 발터 벤야민을 많이들 읽지만 <생산자로서 작가>만큼 무의미하게 소비되는 글도 없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정윤석은 이데올로기의 후원자 자리에 있다. 해방은 영화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그랬어야 했다.

한편 휴머니즘을 떠나서 감독에게 물어보고 싶다. 섹스돌도 돌권이 있을진데, 그들이 느낄 수치심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ㅎ 휴머니즘의 시점에서 <눈썹>은 포르노가 아니다. 하지만 아마 인형의 시점에선 답도 없는 포르노일 것이다.

2018년 2월 23일 금요일

고은 사태를 보며

비도덕함은 비도덕함이고 예술은 예술이다 라는 주장과, 비도덕한자의 예술은 곧 사기다라는 주장이 맞서는 가운데, 어느 하나 유의미한 진입로를 짚어내고 있지 못하고 있다.

예술의 진보적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의 예술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의 삶이 잘못되어서 예술이 잘못됐다라고 주장하는 만큼, 그의 예술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똑같이 주장되어야 한다.

그렇다는 건,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고은의 시의 저항성이 근본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선 그 저항성 개념을 가능하게 한 문학적 프레임워크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진보적 문학이 해야할 일이다.

업자로서의 예술가 (2017)

"가난한 예술가가 잘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미출판 에세이에서, 리혁종은 케케묵은 심미주의의 문 제를 다시 꺼내든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지금까지 너무도 경제에 무관심 했으며, 이 문제에 대해 꽤나 급 진적으로 보이는 (한스 애빙 같은) 예술가마저도 문제 해결보다는 문제 제기에 그치고 있었다. "왜 예술 가는 가난해야 할까"라는 질문보다 리혁종에게 필요했던 것은 “미술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에 관한 더욱 현실적인 대안이었던 것 같다. 출사표에 해당하는 "경제적 예술”은 이런 고민을 용례화한 결과다.

리혁종은 이 경제적 예술의 아이디어를 정말로 여러 해 걸쳐서 다듬어 왔다. 대학 시절 작업했다는 <마지 막 잎새>부터 <이카루스 프로젝트> 3부작을 거쳐, 그 뒤 거버넌스 아트라고 불리는 작업의 형태까지 진 행하는 가운데, 돈의 문제를 자신의 (예술) 행위 속에서 한 번도 배제한 적이 없었다. 외려 생산되고 유통 되고 소비되고 폐기되는 삶의 역동적인 순환 한 가운데, 자신이 지속적으로 뭔가를 할 수있길 바랐다. 예 술가로서 계속해서 작업을 하려면? 인간으로서 계속해서 먹고 살기 위해선? 사회나 지구가 존속하기 위 해선 어떻게 작업해야할까? 질문은 이런 식으로 계속 확장된다.

언뜻보면 서구 아방가르드의 예술과 삶의 통합 테제와 맞닿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서구 아방 가르드가 예술을 통한 사회의 혁신을 추구했다고 한다면 리혁종의 경우는 예술이 삶에 앞서지 않는다. 그 에게 예술은 생태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일 뿐이다. 자신의 카테고리를 선명하게 함으로써 입 장을 호소하는 것이 일반적인 비판적 예술가와는 달리, 상황과 조건에 어떻게 유동적으로, 유기적으로 반 응하고 또 엮일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그의 작업은 이러 저러한 민관 기관과 협력해하며, 이것이 부분적으로 그의 카탈로그 레조네의 양식과 스타일에서 중심적 줄기를 찾을 수 없는, 그리고 때로 는 심지어 프로젝트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헷갈리기도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이런 작업의 철 학을 작가는 ‘거버넌스’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말이 주는 강력함과 헛됨 모두는 민관을 막론하고 규모 의 기관에서 혁신을 부르짖으며 공허하게 외치는 말이 거버넌스임을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아방한 예술가라면 리혁종의 이런 태도에 심기불편할 수 있다. 아방한 예술가는 사태와 비판적 거리를 유 지하고 싶어하며 그의 작업은, 바로 그 자리에서, 종종 삶—지배 질서—를 심도 깊이 통찰한다고 믿어진 다. 그 거리를 포기해버린 작가를 그들은 ‘업자’라는 전문 용어로 부른다. 아방한 예술가가 보기에 업자는 작게는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크게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예술로 복무한다. 거리감보다는 근접감이, 비판 보다는 협상이 우위에 선다. 그들은 지배 매트릭스에 예술을 적극적으로 기입하고 그것을 유통시키는 행 위를 하며 질서를 강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아방한 예술가에게 업자로서의 예술가의 출현은 예술 의 위기와도 같다. 그렇다면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지나서, 오늘날의 문제는 ‘아방가르드와 업자’가 된 것일까?

이런 비판은 일견 정당해 보이지만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실로 많은 작업과 비판자가 지배적 삶 의 양태를 비판하지만 그 가운데 자신의 위치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니까 자신의 발 화 또한 지배 질서와 피드백 할 것이라는 불 보듯 뻔한 사실을 그들은 괄호 치는 것이다. 때문에 가장 도 발적인 상품 미학을 가졌던 레디메이드가 오늘날 골동품이 된 것처럼, 많은 예술가와 작품이 종국에는 자 신의 지배권력으로의 지향성을 드러내고 만다. 그렇다면 지배 질서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을 계를 가정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은폐 전략이 아닐까? 그런 장소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안겨주면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업 자를 비판하는 비판자야말로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대변인이 아닐까?

반면에 리혁종은 이런 '의도'에 붙은 순진한 믿음을 배제하고 예술 또한 상품임을, 예술가란 사실 시작부 터 업자임을, 제 생존을 위해 언제든지 예술을 도구화할 수 있음을 자기의식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 니까 “자본주의의 밖은 없다”는 것. 업자로서의 예술가는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의 위치 를 처음으로 제대로 포착해 낸 예술가 모델이다. 예술가보다 업자가 흥미로운 점을 가진다면, 그것은 업 자가 작업을 보다 능동적으로 상품, 나아가 사물의 세계에 기입한다는 사실일 테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냉소적 비판자와는 달리, 업자로서의 예술가는 예술-상품의 리얼리티를 삶 한 가운데서 포착해내며 조정 하며 또 움직이는 자다. 그런 한, 업자의 자리는 실질적이고 능동적인 변혁의 자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 다. 그렇다면 하나의 기대를 걸어 봐도 좋지 않을까. 말은 뻔지르르하게 하지만 실제론 무력하기 짝이 없 던 비판적 지식인보다 외려 업자로서의 예술가가 무언가를 해낼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

하지만 아직까지 리혁종의 작업이 그러한 기대에 근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내가 주장하는 업 으로서의 예술은 말하자면 효과의 예술이다. 의도나 명분보다 결과와 성과로 말하는 것이 그렇게 긴급한 이유는 그것이 현실문제, 즉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판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 는 '이카루스 프로젝트'에서 리혁종은 마치 사이비 헤겔과 같은 위치에 서서는, 성급하게 예술의 종언을 선고하는 가운데,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예술 상품을 만들어 그 이윤을 공공재로 환원시킨다는 서약을 당차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리혁종에 의해 종언 내려지는 예술이 어디의 어떤 예술인지는 분명치 않으며, 마찬가지로 공공재로 환원될 예술 상품은, 실상 예술이 채 되지 못한 (예술) 상품이기에, 팔리기 도 전에 잡석 쪼가리가 될 처지에 놓인다. 요컨대 이카루스 프로젝트에서 종언 이후의 예술-상품은 실제 작동하고 있는 예술(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렇게 이카루스 프로젝트는 시작과 동시에 종말을 맞는다. 

이런 문제는 최근의 관심사인 적정기술과 업사이클링에서도 보인다. 적정기술과 관련된 프로젝트에서 리혁종은 당연하게도 예술의 종언 이후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정기술은 예술이 원래는 테크네였다는 사실 을 상기하며 그 중에서도 적정이란 말은 '올바름'이란 꽤나 거버넌스에 편리한 뉘앙스를 잘 함축하고 있 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리혁종의 패착은 본인이 선고 내린 예술의 종언이 상상계 속의 일이라는 사실, 즉 그와 상관없이 예술과 시장이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더군다나, 물론이게도, 그는 적정기술의 개발을 선도하는 그룹에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것의 얼리 아답터나 장인인 것도 아니다. 그 렇다고 적정기술이 정말로 필요한 문제적 지역에 이 기술을 보급하는 행동주의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정기술을 가지고 예술적 테크놀로지의 은폐된 면면을 밝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다시 이야 기할 수도 있다.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은 덜도 말고 더도 말고 관심, 견습 수준일 뿐이다.

이렇게 '실제' 예술이나 기술과 유의미한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그 가운데 지자체의 문화 사업과 “거 버넌스”하는 상황은 업자의 어두운 면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라면 어쩔 것인가. 거버넌스 관계에서 그가 하는 일이란 지역 사회가 요구하는 문화적 산물을 일정 보수를 받고 제공하는 것 으로, 실로 거래 관계에 의한 하도급과 형식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심지어 이런 프로젝트는 종종 본격적 인 예술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며 대중의 관심을 유의미하게 끌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지자체는 이런 문 화적 프로젝트가 이러 저러한 이유—이 이유는 정말로 심각하게 분석되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다—로 필요하며, 업자로서의 예술가는 이런 요구를 적당히 문화란 이름으로 충족시키 며 프로젝트를 무분별하게 양산한다. 먹고사니즘에 영혼을 팔아버린 진정한 이단자로서의 업자로서의 예 술가. 너무 비관적인 건가?

하지만 업자로서의 예술가는 여전히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자리임에 분명하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도 않았던 순수와 비순수의 영역을 허무는 가운데, 예술 또한 삶의 역동성 한 가운데서 움직이는 행위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업자로서의 예술가는 (원인이나 의도가 아닌) 결과 중심의 어떤 정치학 을 발생시킬 수 있다. 어쩌면 그런 상태에서의 예술은 매순간 종말과 탄생을 겪어 나갈지도 모른다. 그런 자리는 예술이나 삶 모두에 꽤나 위협적일 수 있다.

안대웅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