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예술가가 잘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미출판 에세이에서, 리혁종은 케케묵은 심미주의의 문 제를 다시 꺼내든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지금까지 너무도 경제에 무관심 했으며, 이 문제에 대해 꽤나 급 진적으로 보이는 (한스 애빙 같은) 예술가마저도 문제 해결보다는 문제 제기에 그치고 있었다. "왜 예술 가는 가난해야 할까"라는 질문보다 리혁종에게 필요했던 것은 “미술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에 관한 더욱 현실적인 대안이었던 것 같다. 출사표에 해당하는 "경제적 예술”은 이런 고민을 용례화한 결과다.
리혁종은 이 경제적 예술의 아이디어를 정말로 여러 해 걸쳐서 다듬어 왔다. 대학 시절 작업했다는 <마지 막 잎새>부터 <이카루스 프로젝트> 3부작을 거쳐, 그 뒤 거버넌스 아트라고 불리는 작업의 형태까지 진 행하는 가운데, 돈의 문제를 자신의 (예술) 행위 속에서 한 번도 배제한 적이 없었다. 외려 생산되고 유통 되고 소비되고 폐기되는 삶의 역동적인 순환 한 가운데, 자신이 지속적으로 뭔가를 할 수있길 바랐다. 예 술가로서 계속해서 작업을 하려면? 인간으로서 계속해서 먹고 살기 위해선? 사회나 지구가 존속하기 위 해선 어떻게 작업해야할까? 질문은 이런 식으로 계속 확장된다.
언뜻보면 서구 아방가르드의 예술과 삶의 통합 테제와 맞닿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서구 아방 가르드가 예술을 통한 사회의 혁신을 추구했다고 한다면 리혁종의 경우는 예술이 삶에 앞서지 않는다. 그 에게 예술은 생태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일 뿐이다. 자신의 카테고리를 선명하게 함으로써 입 장을 호소하는 것이 일반적인 비판적 예술가와는 달리, 상황과 조건에 어떻게 유동적으로, 유기적으로 반 응하고 또 엮일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그의 작업은 이러 저러한 민관 기관과 협력해하며, 이것이 부분적으로 그의 카탈로그 레조네의 양식과 스타일에서 중심적 줄기를 찾을 수 없는, 그리고 때로 는 심지어 프로젝트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헷갈리기도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이런 작업의 철 학을 작가는 ‘거버넌스’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말이 주는 강력함과 헛됨 모두는 민관을 막론하고 규모 의 기관에서 혁신을 부르짖으며 공허하게 외치는 말이 거버넌스임을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아방한 예술가라면 리혁종의 이런 태도에 심기불편할 수 있다. 아방한 예술가는 사태와 비판적 거리를 유 지하고 싶어하며 그의 작업은, 바로 그 자리에서, 종종 삶—지배 질서—를 심도 깊이 통찰한다고 믿어진 다. 그 거리를 포기해버린 작가를 그들은 ‘업자’라는 전문 용어로 부른다. 아방한 예술가가 보기에 업자는 작게는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크게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예술로 복무한다. 거리감보다는 근접감이, 비판 보다는 협상이 우위에 선다. 그들은 지배 매트릭스에 예술을 적극적으로 기입하고 그것을 유통시키는 행 위를 하며 질서를 강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아방한 예술가에게 업자로서의 예술가의 출현은 예술 의 위기와도 같다. 그렇다면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지나서, 오늘날의 문제는 ‘아방가르드와 업자’가 된 것일까?
이런 비판은 일견 정당해 보이지만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실로 많은 작업과 비판자가 지배적 삶 의 양태를 비판하지만 그 가운데 자신의 위치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니까 자신의 발 화 또한 지배 질서와 피드백 할 것이라는 불 보듯 뻔한 사실을 그들은 괄호 치는 것이다. 때문에 가장 도 발적인 상품 미학을 가졌던 레디메이드가 오늘날 골동품이 된 것처럼, 많은 예술가와 작품이 종국에는 자 신의 지배권력으로의 지향성을 드러내고 만다. 그렇다면 지배 질서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을 계를 가정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은폐 전략이 아닐까? 그런 장소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안겨주면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업 자를 비판하는 비판자야말로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대변인이 아닐까?
반면에 리혁종은 이런 '의도'에 붙은 순진한 믿음을 배제하고 예술 또한 상품임을, 예술가란 사실 시작부 터 업자임을, 제 생존을 위해 언제든지 예술을 도구화할 수 있음을 자기의식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 니까 “자본주의의 밖은 없다”는 것. 업자로서의 예술가는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의 위치 를 처음으로 제대로 포착해 낸 예술가 모델이다. 예술가보다 업자가 흥미로운 점을 가진다면, 그것은 업 자가 작업을 보다 능동적으로 상품, 나아가 사물의 세계에 기입한다는 사실일 테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냉소적 비판자와는 달리, 업자로서의 예술가는 예술-상품의 리얼리티를 삶 한 가운데서 포착해내며 조정 하며 또 움직이는 자다. 그런 한, 업자의 자리는 실질적이고 능동적인 변혁의 자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 다. 그렇다면 하나의 기대를 걸어 봐도 좋지 않을까. 말은 뻔지르르하게 하지만 실제론 무력하기 짝이 없 던 비판적 지식인보다 외려 업자로서의 예술가가 무언가를 해낼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
하지만 아직까지 리혁종의 작업이 그러한 기대에 근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내가 주장하는 업 으로서의 예술은 말하자면 효과의 예술이다. 의도나 명분보다 결과와 성과로 말하는 것이 그렇게 긴급한 이유는 그것이 현실문제, 즉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판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 는 '이카루스 프로젝트'에서 리혁종은 마치 사이비 헤겔과 같은 위치에 서서는, 성급하게 예술의 종언을 선고하는 가운데,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예술 상품을 만들어 그 이윤을 공공재로 환원시킨다는 서약을 당차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리혁종에 의해 종언 내려지는 예술이 어디의 어떤 예술인지는 분명치 않으며, 마찬가지로 공공재로 환원될 예술 상품은, 실상 예술이 채 되지 못한 (예술) 상품이기에, 팔리기 도 전에 잡석 쪼가리가 될 처지에 놓인다. 요컨대 이카루스 프로젝트에서 종언 이후의 예술-상품은 실제 작동하고 있는 예술(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렇게 이카루스 프로젝트는 시작과 동시에 종말을 맞는다.
이런 문제는 최근의 관심사인 적정기술과 업사이클링에서도 보인다. 적정기술과 관련된 프로젝트에서 리혁종은 당연하게도 예술의 종언 이후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정기술은 예술이 원래는 테크네였다는 사실 을 상기하며 그 중에서도 적정이란 말은 '올바름'이란 꽤나 거버넌스에 편리한 뉘앙스를 잘 함축하고 있 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리혁종의 패착은 본인이 선고 내린 예술의 종언이 상상계 속의 일이라는 사실, 즉 그와 상관없이 예술과 시장이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더군다나, 물론이게도, 그는 적정기술의 개발을 선도하는 그룹에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것의 얼리 아답터나 장인인 것도 아니다. 그 렇다고 적정기술이 정말로 필요한 문제적 지역에 이 기술을 보급하는 행동주의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정기술을 가지고 예술적 테크놀로지의 은폐된 면면을 밝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다시 이야 기할 수도 있다.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은 덜도 말고 더도 말고 관심, 견습 수준일 뿐이다.
이렇게 '실제' 예술이나 기술과 유의미한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그 가운데 지자체의 문화 사업과 “거 버넌스”하는 상황은 업자의 어두운 면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라면 어쩔 것인가. 거버넌스 관계에서 그가 하는 일이란 지역 사회가 요구하는 문화적 산물을 일정 보수를 받고 제공하는 것 으로, 실로 거래 관계에 의한 하도급과 형식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심지어 이런 프로젝트는 종종 본격적 인 예술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며 대중의 관심을 유의미하게 끌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지자체는 이런 문 화적 프로젝트가 이러 저러한 이유—이 이유는 정말로 심각하게 분석되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다—로 필요하며, 업자로서의 예술가는 이런 요구를 적당히 문화란 이름으로 충족시키 며 프로젝트를 무분별하게 양산한다. 먹고사니즘에 영혼을 팔아버린 진정한 이단자로서의 업자로서의 예 술가. 너무 비관적인 건가?
하지만 업자로서의 예술가는 여전히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자리임에 분명하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도 않았던 순수와 비순수의 영역을 허무는 가운데, 예술 또한 삶의 역동성 한 가운데서 움직이는 행위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업자로서의 예술가는 (원인이나 의도가 아닌) 결과 중심의 어떤 정치학 을 발생시킬 수 있다. 어쩌면 그런 상태에서의 예술은 매순간 종말과 탄생을 겪어 나갈지도 모른다. 그런 자리는 예술이나 삶 모두에 꽤나 위협적일 수 있다.
안대웅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