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13059
미투운동의 흐름, 즉 남성적 자리의 원죄성을 인정하는 그런 흐름을 따르자면, 나는 남성인 죄와 동시에 한국인인 죄, (상대적) 유산자인 죄 등등을 저질렀다.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이주여성에겐 사실 그걸로도 불충분할 것이다. 나는 이주여성에게 죄인이 맞다. 그들의 처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알려고 하거나 분담하지 않고 그런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안전하게 살아오고 있다.
2018년 3월 12일 월요일
피폭로인 시점
성폭력 관련 피폭로인이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 대응은 먼저 폭로자보다 미디어로 먼저 향해야 하는 것이 맞다. 왜냐면 자신의 사회적 생명과 직결되는 부분은 그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고하더라도, 사실은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해당된다. 법적으로 먼저 따지고 나서 나중에 언론에 밝히겠다고 말하는 건 선후관계가 틀려도 너무 틀렸다. 폭로자 A씨의 말이 거짓말이다가 아니라 언론사 A의 기사는 날조되었다가 되어야 한다. 같은 의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층위가 다르다. 전자의 법정 다툼 대상은 폭로자이지만 후자의 대상은 언론사이기 떄문이다. 정봉주의 대응은 그야말로 매뉴얼 같다. 폭로자를 문제삼기보다 프레시안을 물고 늘어졌다. 여기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타격을 가장 직접적이고 빠르게 완충한다. 다른 하나는 피해자 2차 가해라는 부담에서 보다 멀어진다.
정봉주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미디어에 대한 이해는 정치인에게 근래 볼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다. 하지만 그가 대응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무죄를 입증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23일 24일의 범주적 틀 안에서 정봉주는 기사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 그 외의 날에 대해 그가 해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이 어쩌면 미디어만을 겨냥해서 언론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정봉주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미디어에 대한 이해는 정치인에게 근래 볼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다. 하지만 그가 대응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무죄를 입증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23일 24일의 범주적 틀 안에서 정봉주는 기사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 그 외의 날에 대해 그가 해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이 어쩌면 미디어만을 겨냥해서 언론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Re)presentation = ?
재현은 언제나 뒤늦게 온다. 그것은 후위에 선 지식인의 태도와 닮았다. 모든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그것이 어떻고 저떻다 그제서야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어난 일에 덧붙은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
엇나간 재현, 소위 알레고리적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 일반적인 것이었다. 일어난 일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다르게 해석하면 이미 일어난 일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론이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타임머신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이 타임머신만 탄다면, 어떤 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꽤나 순진하면서도 오만한 생각이었다. 제 머릿속 안에서 일어나는 망상 혁명일 수도 있다는 걸...
모더니스트는 재현에 저항했다. 하지만 불충분했다. 그들이 한 것이란 단지 형상에 저항했을뿐, 더욱 충실하게 제 마음을 재현하려 했다. 그들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감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천재라는 관념이 탄생한다. 예술의 섭리=제 자신 자체인 인간이 요청되어야만 재현하지 않는다가 성립한다. 물론 그건 웃긴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미술의 장치에서 재현을 그만두면 무엇이 남을까? 극단적인 견지에선 작품 자체가 탄생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관객뿐이다. 오직 관객만이 암묵지에서 뚜렷하게 현전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3월 9일 금요일
2018년 3월 8일 목요일
서동진과 권명아
간밤에 서동진 선생이 글을 올렸다. "미투 운동은 견제되어야 한다." 상당히 마르크시즘적 원론이었고 어느정도 통쾌함이 있었다. 내 생각의 60퍼센트 이상은 아마 서동진의 글을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을 퍼나르는, 내가 평소에 혐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미술계 남근을 보고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글의 의도와는 다른 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글쓴이의 잘못일까? 아니면 퍼나르는 인간들의 잘못일까? 둘 다의 잘못일까? 어쨌거나 이런 상황과 문맥은 뭐가 뒤틀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명아 선생의 페북 포스팅을 봤다. 서동진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문맥상 대상이 서동진임은 분명해 보였다.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길, 말을 아끼시기를." 이 말은 서동진의 언급이 반동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서동진에게 미투 운동이 인권을 무너뜨리는 반동일 수 있듯이 권명아에게 서동진의 마르크시즘은 현재의 운동성을 반감시키는 반동일 수 있다. 바꿔말하면 이런 것이다. 권명아에게 미투는 인간이기 위해서 발언하는 것이라면 서동진에게 미투는 인간임을 무시/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임을 지키려는 남성과 인간임을 주장하는 비인간 여성.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하지만 그 복잡성에 비해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이 둘은 모두 당사자 자신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후원자이며 무언가를 생산하는 위치에서 사실은 멀다. 그들은 언제나 변화보다 느리게 반응할 것이며 그때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이에 그 사태는 이미 사라져 없을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나는 미투 운동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생성하는 미투로서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것은 권명아나 서동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나는 그걸 어찌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이것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존경한다. 단, 파시즘으로 향할 가능성이 있는 미투를 좀 더 생산적으로 생성하기 위해서 서동진의 우려는 (부정이 아닌) 긍정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혁명은 그럴 때 마르크시즘으로부터 시작해 페미니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으로부터 시작해 마르크시즘으로 가는 길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글을 퍼나르는, 내가 평소에 혐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미술계 남근을 보고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글의 의도와는 다른 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글쓴이의 잘못일까? 아니면 퍼나르는 인간들의 잘못일까? 둘 다의 잘못일까? 어쨌거나 이런 상황과 문맥은 뭐가 뒤틀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명아 선생의 페북 포스팅을 봤다. 서동진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문맥상 대상이 서동진임은 분명해 보였다.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길, 말을 아끼시기를." 이 말은 서동진의 언급이 반동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서동진에게 미투 운동이 인권을 무너뜨리는 반동일 수 있듯이 권명아에게 서동진의 마르크시즘은 현재의 운동성을 반감시키는 반동일 수 있다. 바꿔말하면 이런 것이다. 권명아에게 미투는 인간이기 위해서 발언하는 것이라면 서동진에게 미투는 인간임을 무시/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임을 지키려는 남성과 인간임을 주장하는 비인간 여성.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하지만 그 복잡성에 비해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이 둘은 모두 당사자 자신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후원자이며 무언가를 생산하는 위치에서 사실은 멀다. 그들은 언제나 변화보다 느리게 반응할 것이며 그때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이에 그 사태는 이미 사라져 없을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나는 미투 운동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생성하는 미투로서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것은 권명아나 서동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나는 그걸 어찌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이것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존경한다. 단, 파시즘으로 향할 가능성이 있는 미투를 좀 더 생산적으로 생성하기 위해서 서동진의 우려는 (부정이 아닌) 긍정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혁명은 그럴 때 마르크시즘으로부터 시작해 페미니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으로부터 시작해 마르크시즘으로 가는 길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2018년 3월 7일 수요일
2018년 3월 5일 월요일
속물적 페미니즘
http://www.hankookilbo.com/m/v/0fc875dc8b5b4541956f82248199504d
"-페미니즘이 왜 중요한가.
페북에서 박권일이 이 말을 두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여성을 애 낳는 기계로 보는 인간이 어떻게 페미니스트냐고. 외려 나는 왜 이 문제가 여성에게 중요하지 않은지, 나아가 사회에 중요하지 않은지 궁금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여성의 다양한 정체성 중 한 측면은 출산기계가 맞다. 표현이 과도하지만 이것만큼 그 의미를 잘 표현해주는 말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출산기계로서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국가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하다면 그것에 관해 지원/보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것을 주장하고 국가와 여성이 협상하는 것은 당연한 사회적 과정이고 진보다. 엄마로서의 여성이나 직장인으로서의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여성의 인권을 이해하는 것과 배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성 인권을 실현화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보고 싶다.
"-페미니즘이 왜 중요한가.
김=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죠. 여성 인력들이 결혼과 출산으로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될까 두려워한다면 아이를 가지려 하겠어요? 이렇게 계속 인구가 줄면 국가의 중요한 자원인 청년 자원도 줄겠죠. 그럼 당장의 경제 활력은 물론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시간 문제에요. 그러니까 이걸 해결하려면 양성 평등이 전제돼야 합니다. 여자들이 일자리를 갖기 쉬워야 하고, 일을 하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 낳아 키우는 게 당연한 일이 돼야 해요."
페북에서 박권일이 이 말을 두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여성을 애 낳는 기계로 보는 인간이 어떻게 페미니스트냐고. 외려 나는 왜 이 문제가 여성에게 중요하지 않은지, 나아가 사회에 중요하지 않은지 궁금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여성의 다양한 정체성 중 한 측면은 출산기계가 맞다. 표현이 과도하지만 이것만큼 그 의미를 잘 표현해주는 말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출산기계로서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국가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하다면 그것에 관해 지원/보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것을 주장하고 국가와 여성이 협상하는 것은 당연한 사회적 과정이고 진보다. 엄마로서의 여성이나 직장인으로서의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여성의 인권을 이해하는 것과 배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성 인권을 실현화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박권일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김이란 사람이 이야기하는 유물론적 토대보다 사상검증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단순히 너의 진정성은 부족해서 내가 보기에 불편하다고 투정하는 오만한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고 느끼는 쾌감이 상당하신가보다.ㅎ 우리나라 지식인은 가만히 보면 조금만 속물적인 것이 문제다. 그 애매한 위치가 오히려 진보를 가로막는다는 생각은 그들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