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9일 월요일

악플 문화

성추행 가해자 지목 외대 교수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언론과 여론은 피해자를 또 다른 가해자로 만들지 말라고 난리다. 피해자가 그 사람을 죽였나? 말은 똑바로 하자. 그런 피해자 담론이야말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 구별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구별될 필요가 있다. 피해자가 여론전을 펼치기로 선택한 건 사실이지만, 가해자 지목을 죽인 자는 피해자가 아니라 여론이다. 즉, 가해자 지목을 죽인 자는 피해자의 섣부른 폭로 같은 것이 아니라 죽일 놈이니 죽여주세요 하고 광장에 사람을 메단 언론과, 제 마음에 안 드는 자에게 너도 나도 하나씩 돌을 던지는 악플 문화다. 차라리 내가 죽였소 하고 정정당당히 나서라. 피해자 뒤에 숨어서 제 행동을 감추는 일은 너무 비겁하다.

2018년 3월 17일 토요일

미러링

미투는 리벤지 포르노를 유포해 여성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의 반동 같은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미러링의 일종.

2018년 3월 16일 금요일

정봉주2

피해자는 안타깝지만서도, 프레시안-정봉주 공방은 어그로와 개그의 소재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다. 오마이뉴스와 한겨레도 마찬가지로 두둔하고 있으므로, 바야흐로 희대의 패거리 병신극이 진행중이다. 피해자가 사라지고 있다. 그나저나 민국파, 미권스, 안젤라, 정봉주, 나꼼수, 무슨 스님의 백팔염주... 뭐 나오는 단어들이 다 왜 이리 저렴한 느낌일까...ㅋㅋㅋㅋ 

2018년 3월 13일 화요일

정봉주. 이런저런.

페이스북에 올리려다가 차마 못 올리고 여기에다 기록한다. 어짜피 무쓸모란 생각 때문에... 여튼. 

정봉주라는 인간 때문에 며칠간 오락가락했다. 그것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하고 시간을 허비했다. 아마 폭로자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진실을 한갓 게임으로 몰고 간 언론에게 말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이런 자조 섞인 생각이 든다. 예술이 해야 할 일을 뉴스가 대신 하고 있구나. (한편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얼마나 마비되어 있으면 뉴스가 이러고 있을까?) 개인적으론 예술적 지식이 뉴스의 그것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예술과 뉴스는 동등한 가치의, 서로 다른 체계를 가진 지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뉴스 자체가 예술이 될 필요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일방향적인 지식 체계가 사회를 압도하는 건 끔찍하다.

미투혁명이 문화혁명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 또한 폭로자가 직접 쓴 글과 직접 나온 인터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확신하게 됐다. 내가 문학은 잘 모르지만서도, 그리고 그걸 꼭 "문학"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그들의 글과 말은 고은 같은 사람의 시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문학처럼 느껴졌다. 이런 문학적 성질이 전달하는 것은 단순한 팩트가 아니다. 팩트와 별개로 어떤 진실이 그 자체로 나타난다. 그건 김지은씨의 말 "내 몸이 기억한다" 같은 종류의 존재론적 증명 같은 것이다.

하지만 뉴스가 사이비 문학화하고 있다는 건 다른 문제다. 그들은 당사자가 아닌, 말하자면 자처한 대리인이다. 미술 용어로 번역하자면 재현의 자리, 실재의 이미지, 불충분한 그림자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그것의 성격을 역이용해서 "-1" 하길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러온 결과는 오늘날의 탈진실적 혼란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패러다임적 관심사는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기구가, 혹은 언론이 제대로 그 진실을 대변했다면, 왜 미투가 피해자 스스로의 입에서부터 나왔겠나? 왜 "내 몸"을 들먹이면서까지 피해자 스스로가 나서야 했을까? 당사자라는 말은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당사자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가 기초할만한 진실 따위가 있기나 할까? 같은 윤리적 합의가 있는 것이다. 언론은 때때로 그것을 망각하고 마치 그들 자신이 당사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다 아닌 것 같으면 당사자와 자신을 분리시킨다. 프레시안의 보도가 딱 그랬다. 나의 당사자성에 대해 말하자면 며칠동안 이 보도 때문에 빡쳤다가 아닌가 하고 당황했다가 다시 더 빡치고... 그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곤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나는 어디다 대고 분노했던 것일까? 아마 언론이 투사한 이미지일 것이다. 이런 몇 겹의 이미지가 중첩되면 그것을 뚫고 존재 자체로 들어가기가 참으로 묘연해진다. 과연 당사자성은 그런 것인가? 혹은 반대로 언론이 당사자성을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조금 보수적인 차원에서 네거티브 피드백이란 관점을 미투에 적용하자면, 우리, 중간자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묵살되지 않고 사법 절차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데 만전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피해자에게 동일시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2차 가해는 중간자들이 행하는 것이고, 그 대상은 피해자 가해자 둘 다에게 향한다. 조금만 덜하고 더해도 더 없어도 될 피해 사실이 생성된다. 만약 그 균형을 기가막히게 잘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동조하라.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완벽하게 지울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없다. 차라리 경찰과 여가부와 정부와 국회에게 더욱 치열한 압박을 가하고 그걸 통해 원래 당연히 그래야됐을 절차적인 문제를 이제라도 제대로 작동시키는 것이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당사자성 및 관심interests과 더욱 가까운 일이기도 하다.

한편 조금 더 급진적인 차원, 그러니까 포지티브 피드백이란 관점에서 물론 뉴스라는 미디어는 선전선동에 효과적이다. 그것을 이용할 필요도 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응징 대상은 좀 가렸으면 좋겠다. 왜냐면 지금의 미투는 너무나 날카로운 날을 가진 반면 한편 약하기 때문에 남용하다간 순식간에 무뎌질 것이다. 특수한 사례를 본보기 삼아 마치 보편인 것처럼 날리면 사이다는 될지 모르겠지만 진짜 보편은 이를 통해 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편적인 것을 한꺼번에 날릴 수도 없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보편성을 담지한 특수성을 날리기 위해서 신중히 노력해야 한다. 그 보편적 특수성이 이건희에 해당할까 정봉주에 해당할까? 만약 이건희도 정봉주도 나쁘다. 그게 성폭력 사건에서 뭐가 중요한가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지나치게 순진하다. 미투는 철저하게 효과의 운동이고 그렇다면 더욱 효과적인 차원을 찾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정봉주를 날리는 것은 내가 보기에 포켓레볼루션에 만족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봉주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 과도한 처벌 때문에, 그것의 진보적인 효과보다 더 강력한 반동적 효과가 미투를 그렇게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정봉주로서 미투는 끝장나게 될 거라고.

나는 미투의 본질 따위를 운운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에서 사실 후자에 가깝다. 미투는 분명히 오염될 위기에 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설사 부정적인 계기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긍정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고종석 선생이 말한 "영구혁명"을 지속해 나가야 사회가 조금이라도 바뀔 것이다. 그렇다는 건 프레시안의 사례에서 미투는 뭔가 배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2018년 3월 12일 월요일

이중의 반성?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13059
미투운동의 흐름, 즉 남성적 자리의 원죄성을 인정하는 그런 흐름을 따르자면, 나는 남성인 죄와 동시에 한국인인 죄, (상대적) 유산자인 죄 등등을 저질렀다.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이주여성에겐 사실 그걸로도 불충분할 것이다. 나는 이주여성에게 죄인이 맞다. 그들의 처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알려고 하거나 분담하지 않고 그런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안전하게 살아오고 있다.

피폭로인 시점

성폭력 관련 피폭로인이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 대응은 먼저 폭로자보다 미디어로 먼저 향해야 하는 것이 맞다. 왜냐면 자신의 사회적 생명과 직결되는 부분은 그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고하더라도, 사실은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해당된다. 법적으로 먼저 따지고 나서 나중에 언론에 밝히겠다고 말하는 건 선후관계가 틀려도 너무 틀렸다. 폭로자 A씨의 말이 거짓말이다가 아니라 언론사 A의 기사는 날조되었다가 되어야 한다. 같은 의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층위가 다르다. 전자의 법정 다툼 대상은 폭로자이지만 후자의 대상은 언론사이기 떄문이다. 정봉주의 대응은 그야말로 매뉴얼 같다. 폭로자를 문제삼기보다 프레시안을 물고 늘어졌다. 여기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타격을 가장 직접적이고 빠르게 완충한다. 다른 하나는 피해자 2차 가해라는 부담에서 보다 멀어진다.

정봉주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미디어에 대한 이해는 정치인에게 근래 볼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다. 하지만 그가 대응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무죄를 입증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23일 24일의 범주적 틀 안에서 정봉주는 기사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 그 외의 날에 대해 그가 해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이 어쩌면 미디어만을 겨냥해서 언론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이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