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analog signal

https://en.wikipedia.org/wiki/Analog_signal
시간에 따라 변하는 양의 재현

2018년 10월 6일 토요일

진짜 뉴스

언제부턴가 주류 언론이 가짜 뉴스를 검증하려 든다. 여기엔 자신들만이 공신력 있는 진짜 뉴스의 진앙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매체가 진실만을 보도하는가? JTBC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들은 모두 진실을 매개한다. 그런 의미에서 매체는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매개된 것을 전달한다. 그 말은 이런 것이다. 엠비씨의 진실은 엠비씨다. JTBC의 진실은 JTBC다. 한겨레의 진실은 한겨레다.

그래서 가짜뉴스의 검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디어리터러시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진실의 한계는 개인의 미디어리터러시의 한계다. 충분한가? 그렇다면 개개인의 미디어리터러시가 아이템의 진위를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개인이 그런 공정한 판사의 위치로 간다면 거기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모두가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판에 또 하나의 "진짜"를 추가하는 것?

2018년 10월 4일 목요일

tragic-comedy

백남준이 자신의 퍼포먼스를 일컬어 자주 쓰는 말이다. 백남준은 샬럿 무어맨과 1966년 곤돌라 해프닝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기습적으로 벌였다. 무어맨은 이때 스코어를 따라 베니스 운하의 오염된 물에 뛰어 들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발진티푸스에 걸렸다고 한다. 그들은 돈이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유레일 패스 1등석 대합실에서 하룻밤을 지샜다고 하는데, 그걸 두고 백남준은 tragic-comedy라고 했다. 비스바덴 갤러리 22에서 플럭서스 창립 공연도 백남준은 희비극이라고 불렀는데, 매키우너스가 계획했던 것이 잘 풀리지 않았던 상황을 회상하며 그렇게 불렀다.

그러니까 희비극보다 더 적절한 한국말은 웃프다인 것 같다. 웃프다...

오늘의 인용: 비판은 과정을 해명하거나 풍부하게 하거나 완성할 필요가 없다.

"It's not that the work speaks best for itself, but that it always speaks with us--no matter who we are. Criticism doesn't need to explicate, enrich, or complete the process."

from Patricia Mellencamp, "The Old and the New: Nam June Paik," Art Journal, Vol. 54, No. 4, Video Art (Winter, 1995), p. 43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조영남부터 조덕배까지

예외적인 예술가가 아니라면, 예술계는 예술가의 업장이다. 대다수의 덜 야심찬 예술가는 업장의 관례를 위반하지 않고, 따른다. 

그런데 예술계라는 업장의 관례는 사회적 룰과 매우 다르며, 때로는 예술계 내에선 이미 안정화되고 식상한 것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사회에서는 여전히 낯설고, 따라서 불화를 일으킬 가능성을 가진 것도 있다. 다만 아직 표면화되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 않을 뿐이다. 덜 야심차고 순진한 예술가가 만약 어떠한 계기로 그 지점에, 그러니까 표면에 도달한다면, 바로 오늘날의 사태가 벌어진다. 분명히 하던대로 했는데 몰매를 맞고 매장당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갓 예술가의 탓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예술계가 고립되고 사회와 동떨어진 자기 논리를 수십년간 계발하고 정당화시켜온 결과, 조영남과 조덕배는 필연적이다. 순진하게 룰을 열심히 따랐다는 것을 잘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문제의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거듭 말하자면 이들은 야심차고 예외적인 예술가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룰을 바꾸지 못하고 따른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그렇듯이. 생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학습한 것이다. 왜 사회는 그것을 예술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가? 왜 예술계는 여기에 침묵하거나 동조하는가?

비유하자면 예술계는 썩어 빠진 부실기업이지만 관심망 밖에서 예외적 혜택을 받고 있었다. 정말 비판받아야 할 것은 이런 예술계를 만들고 정당화했던 모든 것이다. 특정 인물일 수도 있고 기관일 수도 있고 제도일 수도 있고 담론일 수도 있고 그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근본적인 비판을 통해 예술계가 사회와 협상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몇 놈 잡아 족치고 봉합하는 제스처에 만족할 것이다. 그건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방위적인 재조정이 필요하다.

탈진실적 상황에 대해

지금 누군가가 '오늘날은 탈진실적 상황이 되어 버렸어'라고 한다면 얼마나 이 말에 비판적 효과를 바랄 수 있을까. 거의 없다고 본다. 이유는 저 말이 진실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진실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탈진실이란 것은 진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진실이 세계의 작동 원리로 드러나 버린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과학과 정치가 역사적인 시행착오를 거쳐서 알아낸 진리이기도 하다.

심지어 진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더라도, 탈진실을 비판하는 사람조차 이미 탈진실적 상황 안에 들어와 있다. 비판은 발화 즉시 탈진실의 상대성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크리틱만 그것을 모른다. 자신은 탈진실의 외부에서 탈진실이라는 말꾸러미를 직시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고 착각한다. 발화의 변형을 무시하는 걸까? 혹은 무서워하는 걸까?

어쨌든 그렇다면, 진실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야기가 어떤 (상대적인) 진실을 발생시키는지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은 서로 다른 진실의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진실의 역학 관계를 살핀다는 뜻이다. 만약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실이 절실하다면, 이야기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지원군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한 진실은 또 다른 진실과 똑같은 방식으로 연합하거나 그것에 반하는 종류의 진실과 대립해야 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이야기하는 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런 종류의 매커니즘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해하기로, 다른 말로 그것은, 정태적인 정치가 아니라 정치하기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황교익과 국뽕

황교익이 비판하는 국뽕은 황이 민족주의자가 아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에 국뽕이 심기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불고기를 통해 황교익이 말하고자 하는 건 불고기가 야끼니쿠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보다, 불고기는 우리 뿌리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