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5일 월요일

기든스, 민족국가와 폭력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1635


김광석,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1994)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물 흘러 내리는 못다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어느 하루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어느 하루 바람젖은 어깨
스치어 지나가고 내 지친 시간들이
창에 어리면 그대 미워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람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단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영화 <클래식>, 눈이 먼 조승우를 손예진이 만나는 장면에 삽입되었다. 그런 김에 오랫만에 1990년대 음악을 유튜브에서 쭉 들었다. 사실 나는 90년대 말에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온전히 90년대의 문화를 잘 알지 못한다. 당시에는 인터넷 같은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에 접근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그 당시 내가 돈이 있었을리가 만무하다. 알고 싶어도 완전히 접근할 수 없는, 흐릿하게만 느꼈던 90년대의 문화의 파편. 그럼에도 내가 공감하는 건 이쪽이다. 

2019년 4월 9일 화요일

세월호 5주기 전시

세 명의 기획자가 "기획"한 전시다. 이 전시가 공유되는 모습을 보면서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전시에 참여한다고 포스터와 장소를 공유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타 전시 홍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일까. 좌파 행세하는 현대미술가와 인사가 '드디어' 나서기 시작하는 꼴이 못마땅해서일까. 이렇게 관대해진 victims의 누그러운 태도에 조금 심술이 난 것일까. 3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3년 전 나는 무엇을 위해서 누구와 싸웠을까. 세월호를 거대한 음모론적 장소로 만든 국가폭력과 싸워야 했을 터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도 부인하는 냉소적 이성과도 싸워야 했을 터다. 그리고 중간 지대에 놓인 사람에게 그것을 호소해야 했을 터다. 내가 한 일은 어땠을까. 그것을 위해 전시를 더 잘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당시에는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갈등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 사람들이 갑자기 이해를 잘 하기 시작한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세월호는 이미 화해가 끝난 사건이다. 그러니까 세월호는 더 이상 굳이 이해를 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므로 갈등도 없는 것이다. 기획자와 당사자 사이, 즉 예술과 사회 사이를 이제 극렬하게 이어 놓는 작업을 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관심 밖의 일이다. 그래서 전시로 매끄럽게 소화될 수 있다. 이는 내가 제일 경계했던 일이었다.

2019년 4월 4일 목요일

서울문화재단 사태

https://news.v.daum.net/v/20190403101023286?fbclid=IwAR0IYRHMu0fhESMVmB266k6Vo5XKWS-i9tX9HLkXdIaOGX9DTZVSamOgZEs

웃기는 일이다. 재단 직원은 직원대로 관료주의의 병폐를 순진무구하고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고 예술가는 예술가 나름대로 숙달된 행정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대부분 예술가는 예술가와 예술 생태계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 서울문화재단은 예술 생태계를 형성한다는 명목으로 예술가에게 작업 지원금을 주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술 생태계란 무엇인가? 예술가가 작업과 전시 지원금을 받는 것으로 예술 생태계가 구성될까? 이런 예술생태계에는 실로 누가 참여하는가?

서울문화재단은 서울시와 정부에서 출연한 기금으로 형성되어 있다. 즉슨, 국민과 시민이 예술생태계를 형성하라고 코묻은 돈을 낸 것이 모인 기금이라는 뜻이다. 그 예술생태계는 그래서 근본적으로 그들의 동의에 기반한다. 예술가는 작업을 할 때 이것을 생각할까?

내친김에 박찬국 선생은 아예 기금을 예술가가 운영하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https://www.facebook.com/chankookc/posts/2214232158643785?comment_id=2214988278568173&notif_id=1554342739681565&notif_t=feed_comment_reply) 더욱 급진적인가?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아 놀랍다. 그들의 논리는 예술가 지원에 무슨 이런 복잡한 절차가 많느냐에 머물러 있다. 예술가를 왜 지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예술가가 왜 지원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주장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 예술가가 어떠한 예술가인지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예술가는 예술가 일반인가? 지원제도는 필연적으로 선별화 과정을 거친다. 그러니까 될 놈에게 돈을 주자는 아이디어는 박찬국의 생각에서도 다른 게 없거나 생략되어 있다.

박찬국의 이 급진적 생각을 역으로 돌리자면, 어떤 예술가를 지원할지는 시민의 투표를 통해 직접 결정할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그게 힘들다면 시민의 대표가 그 일을 대행할 수도 있다. 여기에 예술가가 토를 단다면 어떤 식으로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예술 발전을 이룩해낼 수 없다? 김남수 선생이 도발적으로 물었듯이, 공공미술이 일색임을 걱정해야 할까? 그런데 그 제대로 된 예술을 굳이 무지한 시민의 동의를 받아야 할 수 있을까? 이때 공공미술이란 미술 아닌 것을 싸잡아서 무시하는 일종의 멸칭으로, 민중미술이 모더니즘 아닌 것으로 구성된 것과 하등 차이가 없다. 말이 되나?

어떤 면에서 지금 지원 시스템은 충분히 예술가 중심적이다. 더 예술가 중심적으로 향한다면 예술가라는 특권층을 정부나 지자체에서 키우는 것이 되거나, 반대로 정부가 예술가를 돈으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권력을 키우는 꼴이 될 것이다. 이 둘은 어떤 면에서 같다. 여기서 예술은, 최소한 그 시스템 안에 있는 예술은 탈정치화된 무엇으로 남겨질 공산이 크다. 지원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선별화 과정을 거치고 거기서 선발된 예술가는 이제 등따시고 배부른데 불만을 제기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 중심의 지원금 시스템은 역설적으로 그 시스템 밖에 있는 예술가의 분노에 정치를 넘겨야 할 것이다. 그 분노가 만약 다시 시스템 안에 들어간다면, 또 그 분노는 다른 이에게 반복될 것이다. 여기가 헬조선?

2019년 4월 2일 화요일

김의겸 비판?

진보의 민낯이라는 표제로 김의겸의 부동산 투기 건이 정치 뉴스를 달구고 있다. 비판의 논리는 전형적인 좌파의 것이다. 즉, 386 리버럴 진보는 강남좌파와 다르지 않으며, 그들은 현상황의 계급 갈등을 전혀 해결할 생각이 없으므로, 결국 내린 결론의 끝이 부동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리버럴의 무의식이 표층으로 드러난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좌파는 웃음을 감출 길이 없다. "거 봐 내 말이 맞지"라고 하면서.

그런데 이 논리가 우파에게 전유된다는 것에 좌파는 크게 관심이 없다. 똑같은 논리가 연일 보수 일간지와 종편을 도배한다. 물론 이들은 계급 갈등을 세대 갈등으로 치환시키며, 젊은 세대의 분노를 가시화하고 증폭하려 한다. 그럼에도 목표는 같으므로, 이 건에 한해서, 좌파가 우파를 공격하거나 그 반대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거듭 이 건에 한해서는, 최소한, 일종의 공동전선 위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김의겸을 비판하는 것은 대충 어디에라도 들어가므로, 비판 자체에 도착된 자들에겐 최상의 떡밥이다. 좌파를 선택할 수도 우파를 선택할 수도 경우에 따라서 좌우파를 모두 선택할 수도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계급"의 청년 "세대"라면 사실 할 말이 많고 지원군도 많은 것이다. SNS 상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쓰고 관종이라고 읽는다)가 이것을 놓칠쏘냐? 냅다 떡밥을 물고 신나게 흔들어 제낀다. 요즘 유행하는 당사자성에 따르면, 이들은 한없는 약자이므로 못느낄 분노가 없고 못할 말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좌파는 현실 정치를 냉소하는 것 같다. 벤야민이 바랐던 것처럼 문득 어느날 계급혁명이 휴거처럼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 모든 진보적 제스쳐에 그럴지도 모른다. 한편 우파는 너무도 현실 정치적이어서 아주 약간의 유토피아도 상상하지 못하고 냉소한다. 즉, 모든 것은 경쟁이고 싸움이고 생존이라서 지금 순간 어떻게 내 것을 지키고 보전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좌우파의 냉소, 공동전선이 사회를 덮는다면, 지금의 정치는 서로가 서로를 재생산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무력감은 어쩌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만을 진리처럼 알려준다. 과연 그럴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그거대로 파국을 상상해내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라면? 우리는 현실정치와 유토피아를 기어이 연결해 내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실천은 김의겸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지키는 모순적인 일부터 시작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책임지는 글

1986년 기성전에서, 조치훈은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라고 했다. 전치 25주의 중상을 입고서도 휠체어에 앉아 바둑을 두었던 일화로부터 유명해진 말이다. 뭐랄까, 이 말은 투쟁을 위한 투쟁 같은 가미가제의 진정성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달까, 그런 의미에서 할복 자살을 한 미시마 유키오의 형식주의 미학과 겹친달까. 최근 바둑 해설 보는 것에 빠져서인지 책임지는 글이라고 했을 때 떠올린 건 조치훈이었는데, 별로 잘 어울리는 일화 같진 않다. 그럼에도 요즘 목숨을 걸고 글을 쓰는 이가 있을까? ㅎ 너무 촌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