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에 안 맞는 차를 샀다. 고르고 고르다가 어째 어째 샀는데 민하도 마음에 들어하고 나도 맘에 든다. 아직 운전이 미숙하지만 그럭저럭 대충 피하면서 하긴 한다. 나머진 하늘에 맡겨야지 뭐 별 수 있나.
2021년 5월 21일 금요일
수족관의 삶
주택을 개조해 만든 부산 오픈스페이스 배의 조그만 방 여럿에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핸드메이드 수족관 몇 세트가 설치되어 있다. 그것은 횟집의 영업용 수족관부터 분재나 가구와 결합된 커스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오래된 느낌을 자아내는데, 아마도 사용된 재료를 모두 주워 온 탓일 테다. 또 이 수족관에는 여러 치어가 실제 배양되고 있어, 마치 어린 시절 익숙한 수족관의 기억, 그러니까 조그만 생명을 길러보고자 시도하고, 방치하고, 실수하고, 실패했던 그런 기억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생명이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조그맣고 취약한 것이다.
여러 곳에 붙어 있는 메모를 읽으면서 진행하면, 수족관이 자전적 메타포라는 사실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반영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아처럼 보이는데, 그 순간 수족관이란 장소적 메타포에는 의미가 여럿 중첩된다. 준비하는 장소로서 스튜디오, 그리고 전시하는 장소로서 갤러리.
그러니까 예술의 장소적 기억이라고 할까? 그렇게 아름답진 않다. 특히 작가의 작업실 침실로 제시된 3층 통로 옆 조그마한 방이 그런데, 배치된 야전침대와 수술용 트레이와 도구는 전쟁 중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군인이 대강의 조치를 취하고 어서 빨리 쉬어야만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런데 중요하게도 이 방에는 아무도 없다. 마치 키우던 금붕어가 죽고 나서 한동안 방치된 수족관처럼, 볼 수 있는 것은 온통 긴급성이 지나간 부재의 흔적뿐이다.
한편 문고리 대신 붙어 있는 마네킹 손을 잡고 밀고 들어가야 하는 다른 방에서는 빔프로젝터가 한 벽면에 쏘아져 있고, 벽에는 여러 오브제가 둥둥 떠다니듯이 붙어 있다. 여기서 VIP에게 자신의 작업을 소개하고 있을 작가의 모습을 떠오르며, 그래서 그런지, 볼 사람과 보여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은 채로 홀로 틀어진 영상과 장식된 오브제는 실로 기괴하게 느껴진다. 어떤 종류의 긴급성과 어긋남, 실패의 감각, 초현실주의자가 보면 낭만주의적 폐허라고 불렀을 감성 같은 것이 이 전시 곳곳에 서려 있다. 무언가 몹시 붕괴하였고, 하고 있거나, 할 것인데, 그건 작가 자신일 수도, 미술계일 수도 있다.
옥상 끝 방에 들어서면 좀 더 구체적인 삶이 보인다. 이 방에는 제주도 출신의 여러 미술 관련 간행물이 일렬로 진열이 되고, 탁자와 의자가 누군가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말하자면 응접실로, 작가 자신을 다른 이에 홍보하고자 하는 공간이라고 해야 할 텐데, 막상 느껴지는 것은 적막과 고독, 손이 한동안 닿지 않았던, 부식되거나 풍화되거나 퇴적된 감각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기어이 사라지고 말았을까?
전시는 소위 말하는 기획된 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작가는 작업과 전시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여한다. 소위 말하는 진정성을 이입하면서 작가와 작업 사이에 끈끈한 연결을 만들어 내며, 어떤 경우에 그것은 기획된 것이 경계 짓는 분할선을 가로질러 보편적 공감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경우 그런 것처럼 보이며,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자전적 회고를 넘어, 어떠한 종류의 작가적 삶의 일반 모델을 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 작가가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 작가의 커리어를 생각해본다. 분명히 지배적인 흐름이 분명히 있고, 이를 둘러싼 권력도 작동한다. 그것은 불명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확실한 어떤 분할 선을 긋는다. 알만한 주요 대학을 졸업해 주요 공간에서 전시하고 주요 큐레이터와 비평가와 얼마나 네트워크를 형성했느냐 등에 따라서 기회와 커리어의 격차가 발생한다. 이런 풍경을 멀찌감치 바라보는 지방 소도시의 작가는 어떤 기분일까? 대체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먹고 살면서? 누구와 어떤 미래의,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대다수 작가에게 아무도 오지 않는 스튜디오와 전시장은 치어가 담긴 방치된 수족관과 비슷하다. 그들 또한 언젠가 스튜디오와 전시장을 비울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떤 종류의 윤리일지도 모른다. 이들을 더욱 잘 알 필요가 있다.
2021년 4월 26일 월요일
단상
4월이 거의 다 지나고 있다. 공허하다.
공부도 일도 하고 있고 그럭저럭 살고 있으니 남들이 보기엔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 스스로는 전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냥 돈 벌고 대충 수업 떼우며 최소한의 삶만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것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이상한 일이다.
무언가를 이루어 낸다는 느낌을 가져본지 오래다. 그런 일을 하기도 싫다. 물론 무언가를 한다면 열심히는 할 거고 성과도 낼 것이다. 그런데 그뿐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많이 지겹다.
그러고 보면 어린이처럼 호기심과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나이도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미술계에선 나이가 많아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점점 그런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호의적인 동감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어린애들 장난처럼 보인다. 조로한 건지. 큐레이터 실격이 아닌가.
2021년 4월 20일 화요일
오세훈 사과 발표에 관해
오세훈이 전임 시장의 성추행 범죄에 관해 사과에 나섰다. SNS 게시물을 성인지감수성이 높다는 젊은 세대가 공유하고 나섰다. 환경을 보호해야한다는 걸 사람들이 몰라서 쓰레기를 만드는 게 아니다. 이 쓰레기가 장기적인 생존에 불이익을 줄 것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무한한 쓰레기를 만든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
같은 의미로 성폭력이라는 게 나쁜지 몰라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게 아니고, 또 오세훈 같은 사과의 말을 할 수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접대를 받았을 거라고 쉬이 추측할 수 있는 오세훈이 그런 속시원한 말을 한다는 것, 마치 환경을 보호해야한다는, 그런 종류의 주장이 맞는 말 같은가? 물론 맞는 말이다. 박원순보다 오세훈이 더 문제가 많을 거라는 의심만 빼고.
니가 보는 게 바로 니가 보는 것이다라는 미니멀리즘 현상학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미니멀리즘은 경험을 미술에 중심에 놓았을진 몰라도 경험 이외의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보는 것만 본다는 소리다. 하지만 니가 못 본 것은 니가 못본 거다라는 생각도 해봤으면 좋겠다.
2021년 4월 13일 화요일
뉴딜-공공미술 사업 비판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요즘 뉴딜과 관련해서 다시 공공미술에 대한 비판이 입에 오르내린다. 호방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내 과거의 모습을 본다. 나는...글쎄. 이제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뉴딜은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구실을 공공의 이익에서 찾는 게 핵심이다. 이건 철저하게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성장해 온 대부분의 미술인과 상극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대부분의 자족적인 미술은 뉴딜 사업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공공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미술을 퉁쳐서 공공미술이라고 치자. 어떤 공공미술이 공공의 이익이 되는지는 굉장히 주관적인 판단의 영역이다. 미술자체가 그렇기도 하다. 아무튼 그러므로 공공미술 사업에서 자신있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돈의 효과가 가는지다. 많은 공공미술 사업은 그런 관점에서 설계된다.
여기서 예술인의 불만. 공공미술의 퀄리티의 문제다. 뉴딜의 핵심이 양적 완화라면 공공미술의 평가에 와서는 그것과 배치되는 문제가 나타난다. 공공미술에는 질적 통제가 필요하다, 라는.
이런 평가를 누가하느냐. 크게 전문가와 일반인이 있다. 전문가들은 미술계 이너서클. 작품같지도 않은 작품을 돈을 써서 지원한다. 프로젝트가 구리다 그런 거다. 하지만 여기서 일반인의 불만은 제대로 인용되지 않는다. 일반인에게도 불만은 있겠지만 전혀 다른 방향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질적인 문제를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첫번째로 이것이 우리에게 왜 필요하냐는 질문을 할 것이다. 이런 반응이 전문가의 비판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공공미술에서 '공공'이 잘못됐다는. 하지만 사실 말을 들어보면 그게 아니다. 두 번째는, 공공'미술'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전문가는 답을 하지 않는다. 왜?
미술이 공공적이지 않느냐, 아니면 공공이 미술을 필요하느냐. 이 두 가지중 미술계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전자이지만, 후자는 전자의 문제의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미술계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집단인지 후자의 생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