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31일 수요일

동시대미술 큐레이터란

큐레이터가 전시를 많이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전시를 주업무로 삼는 직업이 큐레이터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왜냐. 최소한 개인적으론 작가들과 함께 하는 게 점차 지친다. 대부분 불통이 문제이지만 그 심급에는 누가 주도권을 잡는지에 대한 신경전이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작가는 전체상에 손쉽게 접근할 수 없다. 동시대 미술은 일종의 행사가 된지 오래고, 그 행사의 다른 이름은 전시다. 전시에 대한 전체상은 큐레이터가 그린다. 어떤 작업이 전시에 들어오는지부터 어떤 작업이 더 보이고 덜 보이고부터, 어떤 관객을 타케팅하며, 어떤 담론과 연계하고 경합할 것이며, 어떤 사회와 연결할 것이고, 어떻게 예산을 조달하고 분배할 것이며..등등. 이건 작가가 할 수 없다. 왜냐면 작가는 제 작업만이 중요하고 돋보이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작업이 제 작업에 끼치는 손해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게 자신의 고유한 권한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록 전체상에 대한 접근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전시에 임하는 작가가 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내 작업이 돋보여야 한다
2) 내 작업이 돋보이지 않는 상황은 제거되어야 한다

1)에 큐레이터의 도움, 제작 지원, 전시의 흥행 등이 있다.
2)에 큐레이터의 쓸데없는 간섭, 불충분한 제작비 지원, 전시의 불협화음 등이 있다.

일에 협조적인? 작가는 1)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즐긴다. 하지만 좀 더 오쎈틱한 작가라고 해야하나 그런 사람들은 2)에 더 민감하다. 1)과 2)는 동전의 양면이다. 도식적으로 구별하자면, 1)에서는 작가가 을, 2)에서는 작가가 갑이라고 상정된다.

1)의 경우는 별로 문제가 될 게 없다. 작가가 스스로를 을로 받아들이고 변화된 창작의 모드 안에서 활로를 찾기 때문이다. 이 경우 큐레이터나 다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협력할 수록 이익이다. 하지만 2)의 경우, 스스로를 여전히 갑이라고 여기는 경우, 큐레이터와 부딪친다. 내 창작의 권한이 오로지 나에게 귀속된다고 믿을 것이며, 그것을 침해받는 여러 상황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작가-을이 어떤 종류의 협력과 지원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작가-갑은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런 작가는 큐레이터가 그리는 전체상에 훼방을 놓게 될 것이며 서로간 갈등이 시작될 것이다. 큐레이터는 생각한다. 이 작가는 어쩌면 이 전시에 없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큐레이터의 권한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큰 오산이다. 다른 작가-을과의 협력 체계가 몇몇 작가-갑으로 인해 무너진다면, 큐레이터로서 입장이 무척 난처해질 것이다. 큐레이터는 선택해야 한다. 작가-을과 작가-갑 사이에서.

동시대미술 행사를 좋으나 싫으나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작업과 전시와 작가나 큐레이터나 비평가 등등 각자가 상정하는 전통적인 직능이 더 이상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제작이 능력의 연결망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미술계의 작가는 여전히 불굴의 예술혼을 가진 작가이며, 자신이 미술의 현장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대는 많이 바뀌었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사실 원래 없었다. 나는 불굴의 예술혼보다 차라리 업자 같은 마인드를 가진 속물 작가가 좋다. 예술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사람 사는 게 그렇게 별 게 없다. 미안하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권력 관계는 형성되기 마련이고 예술가는 조금 특이한 기술자 나부랭이였고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이었다. 여기서 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내가 큐레이터로서 작가-갑과 주도권 경쟁을 해야 한다면 그건 일이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일이 잘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신념 따위가 아니다. 다른 작가-을에 대한 책임과 연대의식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주도권을 가져간다는 사실 또한 사실이고, 여기에 피치 못하게 억압적인 상황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일이 되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을 못본척 못느끼는척 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상황을 만들기도 싫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하나. 

냉동피자(3)

이후 몇 번 트래지오날레와 레스토란테 두 냉동피자를 몇 번 먹었다. 손님이 와서 꺼내서 먹기도 하고 배가 고파서 먹기도 했다. 실험(?) 당시의 신중함을 견지하기보단 방법만 상기시키며 그때그때 편한 마음(?)으로 구웠다.

사례1: 오일을 먼저 팬에 두르고 예열하기
오일을 먼저 팬에 두르고 최대 온도까지 예열하면 오일이 다 타버린다. 집에 공기청정기 미세먼지 지수가 200넘게 올랐다.

사례2: 물을 많이 적시고 150-180도에서 굽기 시작
도우가 많이 물렁물렁해진다. 그렇다고 탄성이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쫀득하지도 않고 제일 도우 아래쪽 레이어가 그렇게 바삭하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부드럽다고 느낄 수도 있고 아직 다 안 구워졌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례3: 물을 많이 적시고 최대온도 220도에서 굽기 시작
도우 아랫쪽 레이어가 바삭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도우가 딱딱하지 않고 물렁한 부분도 있다. 이게 냉동피자로 뽑아낼 수 있는 최상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만족스럽진 않다. 

2023년 5월 11일 목요일

냉동피자를 향하여(2)

어제 저녁을 피자로 떼웠다. 오트커 박사 레스토란테 모짜렐라 피자 한판을 민하와 함께 먹었다. 마음을 먹었던 대로 피자 바닥을 물로 적시고, 올리브 오일을 팬 바닥과 피자 상판에 뿌렸다. 물론 오븐을 충분히 예열했다. 해동을 시켜라고 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무해동으로 오븐 제일 낮은 랙을 사용해 8분정도를 구웠다. 

결과는..도우가 훨씬 촉촉했다. 쫀득한지는 몰겠다만 부드럽긴 했다. 거기다 맨 아래쪽 얇은 층은 바삭한 느낌도 적당히 있었다. 한국제품에 비해 토마토 소스가 충분히 들어가 있는 것도 특징이었다. 먹었던 냉동피자 중에선 가장 만족스러웠다. 민하도 동의했다. 하지만 일말의 쫀득함을 살리진 못했다. 

야식으로 한 번 남아 있는 고메 토마토소스 피자 한 조각을 같은 방법으로 데워봤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고 좀 건빵 같은 식감이 있었다. 굽는 방법보다 도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기본 피지컬을 후천적인 노력으로 극복하기가 힘들달까..ㅠ

오트커 제품 중 트레디지오날레란 제품이 있는데 도우가 좀 다른 것 같다. 시금치 피자를 주문했는데 후기를 보니 화덕 피자 같은 쫀득함이 있다고 했다. 

트레디지오날레 제품이 오면 같은 방법으로 재시도해봐야겠다.

2023년 5월 9일 화요일

더 나은 냉동피자를 향하여(1)

세윤씨가 소개해준 네이버 동네쇼핑?을 둘러보다가 엉뚱하게 냉동피자 핫딜에 유혹당해 6판을 샀다. 천체 2만 얼마에 샀으니 한 판에 3천얼마. 되게 싸게 주고 샀다.

하지만 이번 구매가 충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냉동피자를 맛있게 데우는 방법을 알아내고 싶었다. 피자는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아니고, 사실 한 조각만 먹으면 물리는데 비해서 너무 과하다. 피자의 토핑이 아무리 화려해도 나에겐 그맛이 그맛이었다. 하지만 많이 기다려야 하고..먹고나면 쓰레기도 많이 남고.. 하지만 그럼에도 피자가 가끔씩 먹고싶다. 그래서 그냥 피자스러운 맛정도를 그때 해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싸고 바로 해 먹을 수 있는 냉동피자가 좋은 선택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막상 냉동피자를 좀 데워먹다보니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먼저 토핑이 적다. 근데 토핑은 뭐 그냥저냥 별로 신경쓰지 않는 타입인데, 치즈를 그렇게 많이 끼얹어서 먹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적응했다. 다만 언젠가부터 도우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냉동피자가 맛이 없는 이유는 토핑의 양이 적기 때문이 아니다. 도우가 맛이 없다.

냉동피자 도우가 건빵과 비슷한 맛이 난다. 무언가 경직되어서, 안에 공기층과 수분이 없이 퍼석하거나 아니면 딱딱하다. 피자도우는 겉바속쫀이 되어야 한다. 겉바속촉보다 더 힘든 경지인 거 같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1. 오븐을 최대한 데워라

2. 빵을 최대한 해동시켜라

3. 오븐의 가장 아랫쪽 랙을 쓰고 아래 열선만 켜라

4. 올리브오일을 붓으로 발라라

이정도를 가지고 오늘 실험을 해봤다. 빵을 해동시키는 건 무리다. 안녹는다. 오븐은 최대한 예열을 했다. 아래 열선만 가지고선 빨리 데워지지 않기 때문에 위아래 열선을 다 쓰고, 적정 온도에서 위의 열선을 껐다. 220도 정도에 도달했을 때 빠른 스피드로 피자를 집어 넣었다. 서서히 오븐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7-8분이 이상적이란 레딧의 의견을 따라서 체크했지만 개뿔. 치즈가 녹지도 않았다. 다시 윗 열선을 키고 4분정도를 더 두었다. 총 11분정도 데웠다. 아마 윗열선을 처음부터 사용했으면 7분정도에 다 녹았을 것 같다. 아무튼. 그러곤 시식.

확실히 그냥 아무생각없이 데웠을 때보단 나았다. 하지만 여전히 건빵 식감이 있었는데, 도우의 상층부(토핑과 가까운 면)는 대충 촉촉했으나 아래쪽으로 갈 수록 퍼석했다. 단면을 봤더니 절반으로 나눴을 때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위 50퍼센트는 여러 소스가 적셔져 있었으나 아래 50퍼센트는 건빵이었다.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닥쪽 빵부분에 물을 적시는 것일 것 같다. 하지만 그럴 경우 너무 말랑말랑 해질 가능성. 흐느적 거릴 가능성이 있다. 그걸 대비해서 오븐팬에 약간 기름층을 만들어두면 좋을 것 같긴 하다.

다음 번엔 이런 조건에서 실험을 해볼 생각이다.

2023년 5월 8일 월요일

스테판 그리말디, 기념관은 왜 필요한가?

메모리얼과 히스토리얼을 구별해야 한다. 1차 대전 이후는 메모리얼이 지어지지 않았고 기념 조상 같은 것이 많이 지어졌음. 당사자는 밖에 나오길 두려워했음. PTSD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 2차대전 이후 메모리얼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세워졌음. 기억해야하는 당위성, 명분이 있었음. 하지만 이는 역사를 한방향으로만 이해한 결과였음.

정의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임. 누군가는 피해자이기도하고 가해자이기도 함. 기억보다 더 중요한 건 공통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 위에 기념관이 있어야 함. 기억으로부터 역사를 분리해내야 함. 사회는 사회의 역사를 '발전'시켜야 한다. 과거의 역사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역사를 위해서.

+ 이 글은 공공미술이 생략한 부분을 정확히 짚어 줌.

https://www.cultureline.kr/webgear/board_pds/7978/%EA%B8%B0%EB%85%90%EA%B4%80%EC%9D%80%20%EC%99%9C%20%ED%95%84%EC%9A%94%ED%95%9C%EA%B0%80.pdf

2023년 5월 4일 목요일

미술관, 현재주의, 인클로저

미술관은 무엇을 하는가? - “The master's tools will never dismantle the master's house.” - Audre Lorde, The Master’s Tools Will Never Dismantle the Master’s House (London: Penguin Modern, 2018).
서울 바벨 - 현재포식
서울문화재단, 레지던시, 세마 코랄의 동시대 취향 - 인클로징 아방가르드

이 주제로 하나비평상에 지원하면 정말 웃기겠네. 

--

나는 우리나라 국공립 미술관이 혁명, 급진, 진보 따위의 단어를 들먹이는 게 웃기다고 생각한다. 이런 단어는 미술로 치면 아방가르드, 극소수의 전유물이다. 
이것이 가능한가? 전위부대는 반동분자다. 체계를 부수려고 한다. 몰상식하게 보인다. 다수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스스로가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알지못하는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다. 별로 공유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냥 세상에 내던진다. 이것이 국공립미술관에서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멋진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이 작동하는 논리가 돈의 논리라는 걸 (누군가는 여기에 불만을 품겟지만) 인정한다면, 미술관의 예산은 세금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술의 무지랭이의 돈이 미술관을 운영한다. 왜? 그건 미술의 무지랭이에게 물어봐야겠지. 
아무튼 간에 국공립미술관이 아방가르드를 후원한다는 사실은 여러 점에서 문제적이다. 불가능한 미션이며 그걸 하려고 하면 할 수록 모순에 빠진다. 대중미술관이 대중과 괴리되어야 한다. 이것을 감당해야할만큼 아방가르드의 후원이 시급한 일일까? 국궁립미술관에게? 미술관이 급진적으로 대중과 괴리되는 것을 택할 필요가 굳이 없을 정도로 사실 지금 한국에서 미술은 대중과 괴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2023년 5월 2일 화요일

바나나남 at 리움

바나나남 사건은 독창성을 따른다기보다 참조성을 따랐음. 원본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파생시킨다고 보기도 힘듦. 이런 것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그러기엔 곤란한 점이 있음.

먼저 이 학생은 예술가가 아니다. 다음으로, 이 학생에게 예술계란 맥락이 없다. 두 개는 이어져 있다. 예술가만 퍼포먼스를 할 수 있냐고? 그런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예술가라고 스스로를 정체화하느냐 아니냐는 현대미술에서 생각보다 중요하다. 현대미술은 뒤샹 이후 맥락을 뒤트는 것으로부터 파격적으로 변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인지는 맥락 안에서 그 정체성을 가지고 노는 단초가 됨. 바로 카텔란처럼..

아무튼 이 학생은 아직 학생이고 예술가의 정체성보다 스스로가 더 내세우는 건 '서울대'와 '미학과'다. 내게 이 단어는 예술계에 보내는 시그널처럼 보이지 않는다. 비예술계, 서울대와 미학과가 더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곳이라는 게 합당해 보인다. (내가 예술가는 아니지만 서울대와 미학과는 내가 이런 행위에 관심을 두는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 보증수표가 되기는 함..) 어마어마한 미디어 노출을 감당하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의 서울대생'이 아무 생각 없이 관종짓을 즐기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감행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상정하고 있는 커뮤니티에서 무언가 얻고자 하는 바가 있다. 그걸 위해서 어떤 예술 비스무레하게 보이는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럼 예술 아니면 이 학생은 뭘 했냐? 내가 보기엔 틱톡에서 볼 수 있는 무슨무슨 챌린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챌린지는 무언가 오리지널한 걸 창조하는 그런 게 아니다. 이미 있는 유행하는 걸 나도 한 번 해본다는 애교섞인 도전이다. 그런 동참 행위를 통해 유행의 커뮤니티에 나도 속하게 된다. 그 기대 효과는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이다. 포퓰레이션은 소박하겐 즐거움의 소재가 되고, 좀 더 야심차겐 다른 목적을 위한 어떤 종류의 지렛대로 활용된다. 무슨무슨 챌린지는 대중이 유행하는 컨텐츠를 수용하는 하나의 일반화된 방식이다. 그렇다면 바나나남이 한 것은 창작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감상이다. -> 창작의 영역인 예술가나 퍼포먼스로 보기에 적당하지 않음

커뮤니티

애초에 이 작업은 글로벌 예술계란 커뮤니티에서 작동한다. 카텔란은 워홀의 블링블링 실크스크린 바나나를 참조해 썩게 만들었으며, 바나나가 썩기 전에 먹어치운 데이비드 다투나 역시 뒤집기를 한 번 더 뒤집은 것과 같다. 모두 예술계 안의 맥락 뒤집기 씨름 한판이다.

그럼 바나나남은 국제예술사회의 커뮤니티에 참가하기 위해서 이 챌린지를 감행했을까? 그건 모순이다. 만약 국제예술사회의 커뮤니티에 참가하기 위해선 창작이란 통행료가 필요한데, 이 친구가 한 건 챌린지이기 떄문에. 

사실 리움 미술관의 카텔란 전시는 글로벌 예술계에서 카텔란 작업이 작동하는 방식과 사뭇 다르다. 부산시립미술관 무라카미 다카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봤듯이, 미술관 방문과 유명 미술 작품 감상은 예술계에서 보는 중요성의 맥락과 거리가 있다. 여기서 미술관은 미술품을 보는 장소가 아니라 핫한 장소, 사진찍기 좋은 장소다. 남들이 다 가는 곳에 나도 가는 것이고 남들이 다 같이 찍는 그 장소에 가서 나도 찍는다. 

바나나남이 달랐던 건 글로벌 예술계에서 일반화된 밈이지만 한국에 아직 도입되지 못한 것을 제일 먼저 한 것이다. 말하자면 해외 유행하는 걸 한국에 제일 먼저 도입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