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31일 일요일

프리랜서와 기관 큐레이터

프리랜서로 있을 때에 비해 기관 큐레이터가 되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바뀐다. 프리랜서로 있을 때는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서 무언가를 하기가 쉽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오로지 자기를 위한 일이다. 반대로 기관 큐레이터는 태생적으로 시스템을 유지 보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는 일 대부분은 자신을 위한 일이라기보다 시스템을 위한 일이다. 그래서 프리랜서의 큐레이팅에서 큐레이터가 돋보인다면, 기관 큐레이터는 무언가를 해도 시스템이 보이지 큐레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기관 큐레이터의 미덕은 여기서 그런 거 같다: 안정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안정적으로 굴러가게 하는 것. 정리하면 프리랜서가 상대적으로 내용에 충실하다면 기관 큐레이터는 상대적으로 형식을 만든다. 그래서 프리랜서에게 어떤 프로젝트를 했냐 묻는다면 주제와 관여 작가 등등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기관 큐레이터에게 묻는다면 그건 미술관에 어떤 사업이 있느냐는 말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2021년 10월 28일 목요일

몸과 옷

왜 이렇게 사람들이 외모에 집착하고 몸을 자르고 붙이고 늘이고 보형물을 넣고 그러는지에 대한 유물론적 대답 하나는 옷 때문이다. 옷은 표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가장 그런 걸 극단적으로 추구한 결과가 럭셔리 브랜드다. 동시대 패션에서 가장 새롭고 급진적인 건 다 여기서 나온다. 그래서 옷에 대한 흥미가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건 결국 명품이다. 그리고 명품이 등재한 어떤 모델은 결국 다른 저렴한 브랜드가 부분적으로 카피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옷은 가장 몸과 맞닿는 물건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옷은 당연히 그것이 싸고 있는 몸의 사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옷이 몸에 맞지 않으면 엄청 불편하다. 그래서 다음 단계에서는 명품에 어울리는 몸이 필요하다. 아방가르드 명품 모델이 누군지를 떠올려 보면, 어떤 종류의 신체를 렌더링하는지 알 수 있다. 가느다랗고 긴 몸, 큰 눈, 오똑한 코, 작은 얼굴 등등. 큰 맘먹고 그 비싼 명품 옷을 샀지만 내 몸이 받쳐주지 않아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어찌보면 슬픈 일이다. 

올해인가 빌리 아일리시 같은 연예인의 명품 학대 패션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학대라는 말이 재밌다. 이런 말은 매우 소중히 보호하고 지켜줘야 하는 대상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 쓴다. 그런 워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건 이미 심급에서 숭고한 대상이 되어 있는 명품이다. 옷이 이렇게 숭고한 대상이 되는 이유는 당연히 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미니멀리즘적 현상학이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 표면은 매우 중요한 문화정치적 국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화된 이데올로기다. 여튼 그렇게 비싼 옷을 몸이 간과하기엔 어려운 일이다.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옷을 위해서 몸을 고치는 사람, 다시 말해서 옷에 몸이 배신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없는 사람이다. 명품 학 패션에 쾌감을 느끼면서도 막상 명품을 샀을 때 대개 하게 되는 건 살을 빼야지일 거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고흐의 워커 그림에 대해 논한다. 하이데거는 닳고 닳은 워커를 통해 워커가 겪어 왔을 바람과 흙과 쓸쓸함, 농부의 느린 밭고랑 등을 상상한다. 워커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건 그냥 방구석에 있었다면 전혀 주목받지 못했겠지만 그림으로 그려 놓으니 그런 것이 느껴진다. 그런것이 무엇일까? 하이데거가 땅(earth)라고 부르는 것,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요즘 말로는 생태 같은 것이다. 여기서 표면은 땅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과하다. 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중요한 것이다. 표면은 땅을 여기로 불러 세우기에. 이런 오래된 미학을 우리가 다시 음미해 볼 수 있을까? 이게 정말 기원인지는 모르겠지만 방향등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2021년 10월 27일 수요일

구두와 워커



이런게 비평이냐??

 http://jihyunjung.com/blog/text/%EC%82%AC%EB%AC%BC%EC%9D%98-%EC%84%B8%EA%B3%84%EB%A5%BC-%EC%82%AC%EC%9C%A0%ED%95%98%EB%8A%94-%EB%AC%B4%EB%8C%80-_-%EC%9D%B4%ED%95%9C%EB%B2%94/

하...

이중구속

공부와 일. 둘 다 하기가 너무 힘들다. 하지만 일만 했으면 분명 바보가 됐을 거다. 공부만 한다면 먹고 살기 힘들었을 거다. 자동적인 삶은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따분함이 연속되면 일도 대충하게 될 것이다. 반면 어떠한 생산 활동도 하지 않는다면 삶이 불안정해져서 마음도 산란하고 결국엔 공부도 못하게 될 거다. 그래서 결국엔 둘 다 해야한다. 둘 다 한다는 것은 일도 대충하고 공부도 대충한다로 귀결된다. 꼭 그만큼 공부도 조금하고 일도 조금한다. 각각 박력과 반력이 상호충돌하다 어딘가에서 멈춘 결과가 양자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자유로운 삶은 세상에 없는 것 같다. 뭔가를 한다는 건 다른 기회비용의 압박을 그럭저럭 견디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에 타협점을 찾게 된다. 나처럼. 이건 보통의 삶이다. 보통의 삶은 그런 방식의 폭력이 만들어 낸 긴장된 조화다.

2021년 10월 26일 화요일

지바 마사야, 의미가 없는 무의미 - 혹은 자명성의 과로, in 의미가 없는 무의미 (2018)

하..정리할 깜은 안 되고. 천재란 있구나. 인상적인 용어 몇개.

1. Para-maund: 라캉적 팔루스 향락, 과잉, 분출 등과 대비되는 살짝만 솟아오른 언덕

2. 의미 있는 무의미와 의미 없는 무의미

의미 있는 무의미: 라캉적 실재, 칸트적 물자체. 의미화되지 않는 다의성. 이미지와 언어로 포착되지 않음

의미 없는 무의미: 사유나 정신 과정 바깥에 있는 무의미. 라캉적 도식에서 고려되지 않는 물리적 외부 공격. 사유하거나 실패하는 신체 자체의 물리적 문제

3.사교: 사교는 자신을 다의성 ‘이하’로 만들어 (혹은 감산해) 관계하는 것. <-> 전면적 관계는 다의성으로 인해 일어날 수 없음.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의례적, 형식적 -> 형식은 곧 물질

4. 포스트투르스: 지바 마사야가 정의하는 포스트투르스는 가장 내 생각과 가깝다. 예를 들어 이주원 전시때 썼던 서문에서 비쳤던.. 포스트투르스의 의미는 진리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된 진리에 대해 도달 할 수 없기 때문에 해석이 증식하는 상황의 종료. 그 해석의 특권은 보통 레거시 미디어가 가지고 있었음. 하지만 해석에 대해 모두가 신뢰하지 않고 각자의 진실을 가짐. 그 각자의 진실을 지바의 말로 바꾸면 (해석될 필요 없는) 서로 다른 사실 <- 상대주의와 구분 필요

상대주의는 하나의 진실을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상대적 다양성

포스트투르스는 하나의 진실은 없고 펼쳐진 서로 른 사실이 (우연적으로) 있음

-> 여기서 의례, 형식의 중요성: 서로 다른 사실이 공존한다. 그런 것을 묶어주는 것은 형식. 지바는 그 형식을 윤리로까지 확장하고 있음

5. 무뇌성(airheadness): 이승현 선생님은 머리빔성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냥 무뇌상태 그런 게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거 같다. 머리를 비워야 몸이 움직인다. 너무 생각해 무한 다의성에 빠지지 말고 몸이 가는대로 움직다. 그것 밖에 없음. 신체라는 물질이라는 단순한 사실성.<->들뢰즈의 잠재성론. 잠재성론에서는 신체가 가능태(뒤나미스)의 현실태(에네르기아). 수반되는 것.

반면 가능태가 필요 없는, 혹은 가능태가 순수하게 현실태가 된 상태를 가정할 수 있는가? 현실태의 극치=신. 순수현실태란 유한한 존재=행위하는 존재->칸트의 실천이성과 비교해볼것

2021년 10월 25일 월요일

인간 광고판


1인 미디어는 어떤 시대를 열었을까? 웹 2.0을 부르짖던 시절만 하더라도 유토피아적 상상이 하늘로 치솟았다. 지금은 모르긴 몰라도 영상의 대다수는 유료광고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유튜버 자신은 물론 광고임에도 진정성을 가지고 성심성의껏 리뷰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대다수 유튜버의 계정은 1인 광고판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유튜버 대다수가 조금 인기를 얻고 나니 [유료광고포함]을 자랑스럽게 영상 초기에 달았다. 많은 셰프가 최근 유튜브 시장에 뛰어 들었는데 광고가 들어온 걸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강조되는 것은 광고보다 자신의 요리다. 종종 보는 유튜브 중 예도TV가 있다. 요즘 점점 동시대 철학도 다뤄서 도움이 좀 된다. 예도도 자신의 영상에 광고를 넣는다. 영상 조회수는 조금이지만, 시청시간이 길어서 광고가 붙는단다. 예도는 유튜브 수익을 기부하는 데 쓴다. 그럼에도 예도 역시 광고판이란 사실은 정말 부인하기 힘들다.

오징어게임의 깐부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깐부치킨 광고를 거절한 것이 그래서 그렇게 화제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광고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나와 안 맞아서 안 한다고했다. 그렇다면 얘기는 비슷하다. 내가 광고다라는 사실을 다들 감추고 산다. 마치 내가 원래 그런데 광고가 우연찮게 나와 맞아서 붙은 것처럼 보이길 바란다.

김동규가 포착한 저 간판을 휘두르는 광고맨. 저 광고맨의 몸짓은 그 자체가 광고로 기획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저 몸짓은 광고 이상이 된다. 속된말로 아트네. 예술이다. 처음부터 그런 행위가 광고 그 자체였음에도 그 광고를 넘어선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몸은 더 이상 광고판에 관심이 있지 않다. 몸은 오직 자동적이다. 저런 무관심성이 가능할까? 민하한테 귀동냥으로 들은 거지만 랑시에르가 철지난 칸트로부터 길어올린 무관심성이 어떤 종류의 dissensus의 핵심적 태도라면, 저 광고맨의 몸짓 역시 그런 종류의 것이다. 몸짓이 몸과 광고의 연결을 끊어낸다. 김동규는 광고와 예술이 맞붙어서 드물게 예술이 승리한 순간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군중 속에서 반쯤은 혼이 나가 광고판을 열심히 돌리는 몸짓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