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31일 월요일

야나부 아키라,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20)

근대성과 관련된 번역어에 대한 지성사 연구로 매우 드문 케이스로 보인다. 사회, 개인, 연애, 자연, 존재, 권리, 자유 등등. 서양의 근대어에 대응하는 사례가 없는 상태에서 일종의 '학술어'로 국내에 들어왔을 때, 번역가가 취하는 2가지 태도.

1. 외계어적인 한자 조어 -> 기원이 없음 원뜻을 따질 수 없음 -> 카세트효과: 뭔지 잘 모르겠지만 간지나보이고 무언가 좋은 뜻이 그 안에 있다고 믿고 씀

2. 최대한 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말로 바꿈 -> 기원이 있지만 원래 뜻과 차이남

- 서양 근대어 중 고도로 추상화된 단어가 문제가 많이 됨
- 근대어를 많이 번역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2를 선호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1로 감
- 새로운 근대어는 도입 시 사회에 많은 혼란을 주다가 점차 정리 됨
예: society는 처음에 교제 등으로 쓰이다가 모임을 뜻하는 사, 회 등등으로 쓰이다가 어느 순간 사회라는 말로 개인교제와 추상적 집단을 동시에 말하는 걸로 발전

2023년 7월 30일 일요일

전인권,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 (문학과 지성사, 2000)

이중섭의 그림은 속화가 아니라 성화에 가까움. 혹은 주술.
무엇을 신앙 대상으로 하느냐? 샤머니즘적 신앙 대상. 생명 그 자체의 찬양. 가족의 안녕. 민족공동체의 번영.

- 생명사상과 오늘날 생존사상(?)은 연결될 수 있을까?


어머니에 관해

"그것은 한국의 화가들이 그린 어머니 얼굴 그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리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 이중섭이 어머니를 소로 치환시켜야 했던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172)
"그리하여 한국의 화가들은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지 못한다."(173-4)

"그런데 어머니를 그릇으로 변모시킨다는 이 생각 속에는 어머니의 얼굴을 외면한다는 한국적 정신 세계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 우리 모두의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이시다. / 바로 여기에 어머니의 한국적 변용이 있다. 그것은 예술가들이 어머니 얼굴을 직접 바라볼 수 없을 때, 비유, 돌아감, 우상화 작업을 통해 어머니를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국 남성의 정신 세계가 안고 있는 중요한 특성이다. ... 이중섭 예술체계 안에서 소는 사실상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승화되는데, 이것 역시 어머니의 얼굴을 외면하는 한국적 정신 세계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176)

- 고은이 쓴 이중섭 책을 찾아 볼 것
: <이중섭 평전>을 본 결과 이중섭 아내에 대한 묘사가 도가 지나친 부분이 많았음. 이중섭이 실제로 그랬든 아니었든 간에 그런 건 상관없음. 이런 부분을 굳이 평전에 써 넣으면서 이중섭의 예술가성을 신격화시키는 것은 고은이 얼마나 남근중심주의적 세계관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음. 그리고 그것이 다른 문학 곳곳에도 나타날 것으로 생각됨. (고은, 95쪽 등)

자화상에 관해

"여기까지 놓고 볼 때, 한국적 자화상의 뚜렷한 특징은 분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아의 분열이다. ... 이처럼 한국인의 자화상 속에 분열된 자아의 모습이 많이 나타나고, 특히 여성 화가들의 분열이 좀더 심각한 양상을 띠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한국의 화가들이 느끼는 '나'가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근대적 나가 아니라, 공동체에 의해 규정되는 자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화가에게서 자아의 분열이 더욱 심각한 것도, 한국 사화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종속적 관계에 처해 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화가들의 자기 이해 방식은 서양 회화의 자화상에서 입회 자화상 또는 참여 자화상 단꼐를 연상케 한다."(190-4)

"이렇게 볼 때 자화상 그리기는 한국의 화가들에게 상당히 난처한 문제였던 것 같다. 자화상의 기본적 개념은 '거울에 비친 현재의 내 얼굴'을 그리는 것인데, 한국인의 자기 이해 방식은 자기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아들(딸)-애인-남편(아내)-아버지(어머니) 등의 역할에 의해서 규정되는 '공동체적 자아'이기 때문이다."(195)

2023년 7월 24일 월요일

비판의 원인과 작용

비판은 언제나 거리를 두면서 발생한다. 비판을 하는 데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 원인은 원인에서 먼 위치에서 감지된다. 원인 제공자는 스스로를 비판하지 못한다. 라캉의 거울단계가 주체이론인 이유다. 하지만 비판의 작용에는 거리가 없다. 비판의 대상이 명확할 수록, 작용은 항상 원인의 자리 거기서, 지금 일어난다.

그래서 비판자는 비판을 감행할 때 감안해야 하는 것은 비판하는 그 순간 벌려놨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더 이상 부외자가 아니다. 그 말는 비판이 옳고 그름을 판단(judge)하는 거라면, 나 또한 옳거나 그른 편에 속해진다는 것이다. 비판은 제3의 지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무엇이 틀렸다는 비판은 그래서 다른 무엇이 옳다는 작용이 될 수 있다. 선택지가 2개밖에 없는데 하나가 아니라는 건 다른 하나가 맞다는 뜻이다. 민주당 리버럴 깨시민을 까는 사람은 분명히 그런 작용 안에 있다. 여기서 그것과 그것은 다르지. A를 까는 것과 B를 옹호하는 게 어떻게 같냐고 되묻는다면 애휴.. 

더 최악인 건 A도 B도 아니면서 비판하는 자인데, 이들은 신의 눈을 가진 자처럼 행새하면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거나 악화시키거나 비판 그 자체를 자산으로 삼는데, 웃기는 짜장인 미술관에서 "사회비판 미술", "정치"를 논하는 거개가 그렇고 본인만 그걸 모를 뿐이고. 이건 주변에 선생님도 없고 친구도 없어서 본인이 멍청한줄도 모르는 그런 케이스라고 보고.

2023년 7월 22일 토요일

Leon Polk Smith

 https://www.artnews.com/art-in-america/features/leon-polk-smith-abstraction-explore-identity-race-1234674406/?fbclid=IwAR0_1I19Jnmw8zOFCU6_QGYlW5R8e_V1vcPCFj8zlqAFz_QYiKr1EtY3_DI

짧은 글이지만 인사이트가 있다. 그냥 비대상이 아니라 초기 작가가 그렸던 자연주의가 비대상적 화면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것이고, 두 개의 아이덴티티라는 감성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내가 신사실파를 보는 관점이 이와 비슷하다. 마지막에 W.E.B. 두보스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20세기의 문제는 컬러라인이다."

2023년 7월 19일 수요일

70년대 신형상미술과 영상사진, 트리비얼리즘

소시민론을 공부하면서 사소한 것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 미술에 없다고 생각했다. 민관씨와 이야기하면서 불현듯 트리비얼리즘이 미술에서 신형상으로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덧붙여 60-80년대 영상사진까지. 이건 한 번 연구해볼만 한 주제 같은데, 논문으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빌딩 위의 소시민들


크고 작은 길쭉한 목각상이 한 데 여럿 모여 있다. 일군의 목각상에는 일관된 전시 제목이 붙었다. 빌딩 위의 시민들. 빌딩은 좁게 솟은 직육면체이며, 시민은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인물 형상일 텐데, 세부적인 사항이 모두 생략되어 네모로 환원된 빌딩은 차치하고서라도 인물은 실로 뭉툭하게 깎여, 추상화되어, 개별적인 특징을 알아보기 힘들다. 인물 위에 표현된 복식이나 좁은 지면 위에 구성된 상황으로부터 성별이 무엇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도만 가까스로 추측할 수 있다. 거기까지다. <개와 남자>, <담에 기댄 남자>, <숄더백 여자> 같은 제목이 그렇듯, 문자 그대로 딱 거기까지 구현되었다.

이런 압축과 생략이 강화하는 것은 일찍이 김지하가 「현실동인 제1선언」(1969)에서 미술에 소구했던 전형성이다.[1] 하지만 배병희의 전형은 현실동인의 유토피아니즘, 그러니까 오윤이 형상화하고 10여년 뒤 민중이란 이름으로 발견되는 저항적 판본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당연하게도 「제1선언」과 시간차를 두고 나타난 이 조각은 미래적이라기보다 회고적이고 또 다소 멜랑콜리한데, 호명된 시민이 특별한 것 없는 하루하루를 똑같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인이란 점에서, 「제1선언」과 비슷한 시기, 1960년대 말 문학계에서, 참여 담론과 정면으로 맞서며 제출됐던 또 하나의 주체, 소시민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시민 문학의 경우

「새시대 문학의 성립—인식의 출발로서 60년대」(1968)에서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새시대 문학의식의 기본심리”가 소시민 의식임을 천명하며 전후세대와 세대론적 단절을 시도했다.[2] 새 시대를 열었을 4.19 혁명 이후에도 강력하게 잔존하고 있던 전근대적 유산과 식민지 피해서사, 그것을 민족주의 담론을 통해 정치화하는 데 익숙한 참여진영. 이것들과 급진적으로 단절하기 위한 전략으로 김주연이 불러세운 것은 근대적 주체인데,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시민이 아니라 소시민이었다는 점이다.

곧이어 백낙청이 지적했듯, 적극적 자유를 구가하며 공화주의를 실현하는 시민과 달리, 자주 소시민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상황 논리에 쫓겨 당장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는 소극적 존재로 이해되었다. 반면, 김주연에게 소시민은 자기만의 의식으로 개별화한 개인의 내면을 포착하는 새로운 모델로서, 근대적 주체를 긴요하게 요청하던 시대에, 상황적으로 채택한 일종의 극약처방이었다. 소시민 문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대신, 사사롭게 의식에 포착된 외부 세계를 세부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소시민 문학의 대표격인 『무진기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김주연은 이런 미적 의식을 트리비얼리즘(trivialism)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트리비얼리즘은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오히려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의 확인”하면서 “사물에 대한 인식의 눈뜸”을 통해 “아름다운 개성”을 창조하는 것이다.[3] 사소함의 발견은 김승옥이 개인의 내면에 현전한 광경을 재잘재잘 묘사하고, 여학생, 산책자, 샐러리맨 등 배병희가 오며 가며 일상적으로 마주친 인물을 말 없는 조각으로 하나씩 하나씩 새겨나갈 때 비슷하게 발휘되는 감각이며, 이는 거듭, 민중미술에서 포착하고자 했던 ‘현실’이나 ‘주체’와는 매우 다른 현실 감각이다.

실로, 임화 같은 전세대의 비평가부터 백낙청을 거쳐 민중미술가에 이르기까지, 당파적 리얼리스트에게 트리비얼리즘은 총체성의 프로그램을 모자이크처럼 만들어버리는 매우 성가신 감각이었다. 그럼에도 트리비얼리즘은 어떤 면에서, 리얼리즘의 리얼리즘으로서, 리얼리즘이 구현하는 현실 그 이상의 초과-현실을 포착해냈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주의적 재인식」(1937)에서 임화는 왜 그렇게 트리비얼리즘으로부터 리얼리즘을 구별해내려고 했을까?[4] 한편, 그렇다고 해서 트리비얼리즘이 모더니즘에 아주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국문학자 황정아가 날카롭게 파악했듯이, 소시민 문학이 꾀한 ‘내면으로의 선회’는 절반의 모더니즘에 불과한데, 서구 모더니즘이 근대 비판의 틀을 가졌다면, 전자의 경우 소외 상태를 외려 ‘건강한 소시민 의식’으로 봤다는 점에서—그런 점에서 문학의 압축 근대화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그렇다.[5]


소시민 리얼리즘

트리비얼리즘은 그래서, 형식적으로, 개인의 내면과 외부적 현실 양극단 사이에 고속도로를 놓는다. 이것이 트리비얼리스트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받는 이유처럼 보인다. 배병희의 경우 역시 그러한데, 리얼리스트적 관점에서, 소시민의 전형을 형상화한 《빌딩 위의 시민들》은 2000년대의 구본주가 <아빠의 청춘>(2001)이나 <선데이 서울>(2002) 같은 작업에서 형상화하려 했던 샐러리맨의 전형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한편, 단순해서 둔탁해 보이기까지 하는 조각이 보여주는 적막한 심리적 상황은, 되다만 빌딩이 좌대로 보이는 순간,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브랑쿠지의 조각으로 유명하게 논증한, 모더니즘 조각의 탄생 설화와 가까워진다. 좌대를 얻은 순간부터 조각은 기념비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든 돌아다닐 수 있고 또 판매될 수도 있다. 하지만 《빌딩 위의 시민들》은 실로 그 어느 쪽에 가도 만족스럽지 않다.

거듭, 애초에 1960년대에 소시민 모델은 리얼리즘적 세계관이 집권하던 시기, 거기에 대항하는 상황적 대항논리로서 등장했다. 하지만 소시민의 모델은 마치 땔감 마냥 1970년대에 시민에 의해 반박된 후, 시민은 다시 재빠르게 민중으로 다시 만들어져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 정점을 찍었다. 민주화 이후 재출현한 시민은 ‘깨어있는 시민’으로, 정치학자 최장집의 관점에 따르면, 진보운동의 계보 위에 있는, 소시민론이 절연하고자 했던 도덕주의의 한 형태로 다시 복귀했다.[6] 그래서 외부 세계에 차라리 냉소적인 주체에 긍정성을 부여한 경우는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 야심 찬 예술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빌딩 위의 시민들》은 어떤 면에서 동시대 가속주의적 세계관에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매우 느린 속도로 그것이 재현하고자 결심한 것은 차라리 50여년 전 제출되었다 폐기된 모더니즘의 낭만주의적 판본이다.

《빌딩 위의 시민들》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그래서 소시민의 꿈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실로, 역사상 혁명 주체 모델은 모두 엘리트가 고안하고 피억압자에게 요구되었다. 여기서 소시민, ‘역사와 계급의식’보다는 생존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약삭빠른 인간은 어느 틈에도 낄 수 없었다. 속물로 매도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중간 계급을 긍정하고자 했던 소시민 모델은 《빌딩 위의 시민들》에 와서 민중처럼 재현될 권리를 다시 얻었다. 《빌딩 위의 시민들》이 재현하는, 그래서 기념하는 일상, 대부분 소시민 문학을 이끌어가는 힘은 사실 평범한 사람들이 꾸는 꿈이다. 이를테면 다 같이 적당히 건강하게 일하면서 오래 잘 사는 것. 이런 소박한 꿈이 만약 소시민 의식이라면, 《빌딩 위의 시민들》은 그런 소망 이미지를 아주 조금씩의 붉은 색과 함께 사물에 각인한다.[7] 그런 의미에서는 《빌딩 위의 시민들》을 소시민 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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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지하, 「현실동인 제1선언」 , 《현실동인》, 1969, (『시대정신 3』, 일과놀이, 1986, pp.78-102에 재수록).
2) 김주연, 「새시대 문학의 성립-인식의 출발로서 60년대」, 『아세아』, 창간호, 1969, p. 265.
3) 위의 글, pp. 255-257.
4) 임화, 「사실주의의 재인식—새로운 문학적 탐구에 기하여」, 《다빈치 원문/전문》(웹사이트), 1937,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4704 (접근: 2023. 7. 18.)
5) 황정아, 「소시민문학론과 ‘근대화’」, 『인문논총』, 74. 2017, p. 218.
6) 최장집,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하나의 논평」, 『경제와 사회』, 85, 2010, p. 103.
7) 발터 벤야민이 소망 이미지, 소망 상징 등으로 부르는 것은 집단 공동체의 꿈으로, 표면상 가장 자본주의적인 것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내포하고 있다. 벤야민은 초현실주의를 분석하면서, 철지난 상품에서 그런 혁명의 에너지를 예술이 발견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발터 벤야민, 「초현실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8.


2023. 7. 18.

2023년 7월 17일 월요일

라이브니스

김남시는 위의 페북 포스팅에서 매체특정성에 기반해서 liveness에 대한 보수적 견해를 내비친다. 요즘 교회를 가도 그렇고 K팝 공연은 대표적이고, 조그만 무대에서 현전하고 일체감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기술이 마련되어 있다. 하이퍼줌이 가능한 카메라, 라이브 스트리밍 기술, 고해상도 스피커, 홀로그램, 스마트폰을 활용한 네트워크적 동기화 등. 지금 시대에 고전적 연극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다. (동시대 라이브니스의 전환에 대해서는 홍민정, 케이팝 온라인 콘서트의 라이브니스 생성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논문, 2012를 살펴볼 것.) 바로 손석구의 관점이고 간혹 가다가 드라마 연기자의 '정극'을 보고 내가 느끼는 위화감이 그렇다. '가짜연기 같다.' 연기는 원래 가짜다.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이다. '가짜연기'에는 도무지 연기가 진짜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손석구의 감각에서, 이해에서, (진짜) 연기는 과장과 과장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생략을, 물적 조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정극연기'를 여전히 지금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일상적인 감각 속에서, 평소대로, 그렇기 때문에 과장과 생략에 의해 단순해지지 않은, 어떤 종류의 실제적 풍부함을 담아야 한다. 오늘날 그것은 분명히 가능한 일이며, 사실 우리는 이런 정보적 풍부함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세계가 변했고 진짜의 감각도 변했다. 비단 '연극'일지라도 그것을 고민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