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8일 금요일

문재인 재기해와 헤이트 스피치

헤이트 스피치를 종종 권력 관계에서의 약자에겐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말을 한다. 말하자면 "서발턴은 말 할 수 있는가." 물론 없다는 것이다. ... 그런데 위키피디아를 보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몇몇 나라의 법에 따르면, 특정한 그룹의 멤버쉽에 기반한 그룹이나 개인을 공격하는 모든 발화 행위를 헤이트 스피치라고 정의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따위를 참고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다만... 쩝.)

Hate speech is speech that attacks a person or group on the basis of attributes such as racereligionethnic originnational originsexdisabilitysexual orientation, or gender identity.[1][2] The law of some countries describes hate speech as speech, gesture or conduct, writing, or display that incites violence or prejudicial action against a protected group or individual on the basis of their membership of the group, or because it disparages or intimidates a protected group, or individual on the basis of their membership of the group. The law may identify a protected group by certain characteristics.[3][4][5] In some countries, hate speech is not a legal term.[6] Additionally in some countrie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hate speech is constitutionally protected.[7][8][9]

어쨌거나 위키피디아에서 헤이트 스피치가 향하는 속성의 예로 "인종, 종교, 인종, 출신국, 성별, 장애,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을 들었으므로, "문재인 재기해"는 헤이트 스피치의 예에 들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재기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문재인 재기해"는 헤이트 스피치가 될 수도 있다. "재기해"를 단순히 '죽어라'로 해석하면 모욕죄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있어도 헤이트 스피치는 아니다. 래디컬을 옹호하는 평론가는 이쪽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런데 모욕죄 또한 되지 않으려면 전제 조건이 한 번 더 필요한데, 그러니까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모욕적인 언사는 '정치적인 것'의 일종이며, 거기다가 공공장소에서 집회 및 시위를 통해 대한민국 최고 통수권자를 모욕하는 행위는 그 강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정당한 정치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전제의 전제가 합쳐져서 "문재인 재기해"는 헤이트 스피치도 모욕죄도 아니라는 기적의 논리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재기해"를 먼저 정치적 관계로 해석한 뒤, 다시 헤이트 스피치인지 아닌지를 따지면, 재기해에 붙은 혐오적 혐의의 색채는 옅어진다. 다시 간단히 말해서, 남성으로서의 문재인을 덮어 버리고 대통령으로서의 문재인을 강조하면 모든 혐오나 범죄의 행위에 면죄부가 내려진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평소의 래디컬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과는 반대다. 래디컬은 모든 사안에서 젠더 구조를 먼저 의식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통렬한 예는 <더러운 잠>에 관한 페미니스트의 공격이다. 여기서는 절대로 대통령이란 신분이 앞으로 먼저 나오지 않는다. 박근혜의 여성성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고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얼마나 많은 칼럼을 쏟아 냈는가? 그들은 대통령 박근혜에 관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뷔페미니즘" 같은 혐오 발언(이것은 위키피디아의 정의를 보더라도 혐오 발언의 일종이다)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면에서 일정부분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거꾸로 된 방식이 정녕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혹은 설명을 달리 해야 한다. "재기해"는 헤이트 스피치가 맞으며, 정치적인 것은 때로는 헤이트 스피치를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혐오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 싫지만 래디컬 스탠스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좌파의 이중성, 도덕적 결벽증이 이 모순을 봉합하려 한다. 이것이 그들의 진영 밖의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며 지금 좌파적 스텐스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자의 한계인 것 같다.

며칠전

추석 이틀 전에 김민관씨에게 연락이 와서 잠깐 몇몇 사람들과 만났다. 김민관과 이양헌, 문정현이었는데, 쌈지에서 행사를 끝내고 이쪽에 들렀단다.

대화는 모두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다른 인물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로 채워졌다. 언젠가부터 이런 대화 내용에 좀 많이 지친다. 그런데 이제 미술계를 알아가는 그들의 입장에선 재미있는 주제인가 보다. 미술계엔 호사가가 많고 실제로 그들이 만든 소문이 커리어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부터 이양헌은 자꾸 나에게 누구누구 어떠냐면서 묻는다. 그 질문의 의도가 궁금하면서도 그냥 정말 궁금해서 그러려니 하면서 내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 말이 부적절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언젠가는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 될 때 불필요한 오해를 사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냥 이야기했다.

문정현은 나로선 처음으로 제대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건데, 미술계에 대한 분노 같은게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잡지에서 자신에게 청탁을 안 한다는 것에 그랬었는데, 음... 미술계 생활 이후로 제대로 된 청탁을 몇 번 받아보지 못한 나로선 좀 겸연쩍어졌다. 문정현은 먹고 살 것도 걱정을 했는데... 요사이 경제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나로선 또 좀 겸연쩍어졌다. 음...

황교익에 대한...

노정태의 논평은 한 절반만 맞는 것 같다. 황교익은 재료근본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에 가깝다. 뭐랄까. 우파 민족주의는 아니고 좌파 민족주의 정도 될 것 같다. 천조국의 가치를 받들고, 그것에 위배되면 천조국의 임금님이라도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는 노정태가 심기 불편해하는 건, 아마 황교익의 그런 스탠스 때문일 것이다.

재료근본주의자라는 건 미식계의 그린버그라는 건데 황교익은 그렇게 내재적 비판을 자주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시점의 사회에서 구성되어 있던 어떤 전통을 근본으로 내세운다. 아마 본격적으로 자본주의화 되기 이전. 어쩌면 재료근본주의도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황교익에게 근본적인 재료란, 역사와 장소와 재료가 일치하는 뭐 신토불이 그런 거 아니겠나. 그래서 황교익의 논설에는 '원래 그렇지 않았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황교익은 아주 정치적인 태도로 미식 비평을 행한다. 떡볶이 비판은 이명박 정부의 무식한 문화산업을 겨냥한 것이고 치킨 비판은 프렌차이즈를 겨냥한 것이다. 때로는 이것이, "원래 맛이 없는 것을 맛있는 것처럼 세뇌한 것이 떡볶이와 치킨은 맛있다고 느끼는 이유다," 같은 재료근본주의적 태도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미식의 자본주의화에 대한 심기 불편함과 함께, 자본주의 이전을 향한 향수가 동시에 자리잡고 있다.

2018년 9월 26일 수요일

동사로서의 페인팅

페인팅에 필요한 조건을 적어보자. 캔버스와 페인트, 브러시, 팔레트가 먼저 떠오른다. 캔버스의 수직 각도를 맞춰 줄 이젤도, 페인트를 섞기 위해서 적절한 미디엄도, 그것들을 놓을 스튜디오(혹은 그에 준하는 장소)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대상(그것이 재현불가능한 어떤 것일지라도)과, 그것으로부터 페인터에게 떠오른 어떤 심상(그 장소가 머리인지 가슴인지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그리고 그 심상을 브러시로 캔버스에 옮길 몸도 필요할 것이다.

다음으로 한 페인터가 캔버스를 지긋이 보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이 페인터는 갑자기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몇몇 튜브를 팔레트 위에 짜서 브러시로 섞기 시작할 것이다. 오페라와 티타튬 화이트와 레몬 옐로우가 보인다. 오페라와 화이트가 재빠른 스트로크 가운데 오페라도 아닌, 화이트도 아닌, 혹은 그 두 가지와 교묘하게 섞여 있는 핑크색으로 변한다. 스트로크는 멈추지 않고 그 옆에 있는 옐로우를 살살 건드리기 시작하고, 페인트 덩어리의 장력이 적당히 반발하는 가운데 몇 줄기의 노란 빛깔이 핑크색 주변에서 소용돌이친다. 페인터는 그 색의 소용돌이를 브러시로 감아올리고선, 손아귀에 적절한 힘을 분배하는 가운데, 브러시의 각도를 세심히 맞추고, 이미 있는 푸른 빛깔의 터치 옆에 또 하나의 터치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선 페인터는 멈춘다. 또 다시 그것들을 지긋이 바라본다.

지금까지 적은 것은 페인터가 페인팅하는 과정에서 대강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이다. 그리고 거칠게 말해서, 숙련됐다라고 부르는 페인터는 어떤 페인트가 필요한지, 어떤 각도와 위치에 캔버스를 놓는 것이 효과적인지, 어떤 브러시가 어떤 터치를 넣는 데 좋은 것인지, 팔레트에 어떤 위치에 튜브를 짜는 것이 페인트를 섞는 데 유리한지, 하나의 터치가 다른 터치와 어떻게 조응하는지, 혹은 대립하는지, 하나의 터치를 넣는 데에 얼마만큼 다른 세기의 악력이 필요한지, 하나의 색이 다른 색과 나란히 놓였을 때 어떤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지, 미디엄이 얼마만큼 페인트와 스트로크와 질감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런 것들을 행한 결과 그 미래는 어떠할지를 어떤 면에서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꼭 결정론일 필요는 없다. 페인터는 매순간을—페인트를 팔레트에 짜는 순간부터 터치를 넣는 순간, 심지어 터치가 들어가는 순간에 그것을 손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는 순간까지도—불확실성과 맞서야한다. 페인터의 기술이 원숙하면 할수록 이런 불확실성에 기민하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페인터가 자신의 물적 기반을 알아 가면 갈수록, 물질이 자기 스스로의 법칙만을 따르려고 한다는 점을 절실하게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페인터에게도 페인트를 짜고 섞고 칠하고 고치고 그대로 놔두는 모든 순간에 의도를 품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들어보지 못했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다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일 용의도 없다. 감각은 너무나 모호하고 물질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확실하다. 페인트를 섞는 과정에서, 혹은 페인트를 캔버스에 바르는 터치에서, 또 다른 터치가 그것에 포개지는 과정에서, 혹은 페인트와 브러시, 캔버스의 외부적 성질 그 자체로 인해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의도는 항상 옅어지거나 배반 당하거나다. 그렇다면 페인터는, 추상이든 구상이든, 초현실주의든, 표현주의든, 테이핑 조형이든 좌우간에, 미리 상정해 놓은 어떤 형태의 이미지도 절대로 손아귀에 꽉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페인터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보기에, 페인팅과 마주하는 페인터는 상당히, 항상, 불안정성에 내몰려 있다. 그 이유는 다시 말해서, 페인팅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불안정하기 때문이고, 거듭, 페인팅의 물적 조건과 페인터의 몸이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페인터가 표현한 것은 그래서 사실은, 표현된 것이다. 혹은 어쩌면 그렇게 표현된 것에 대한 일련의 반응이 페인팅하기일지도 모른다. 화가는 브러시로 그리는가? 아니면 브러시와 페인트가 캔버스 표면의 마찰을 가로질러 움직인 궤적을 따라잡기 위해서 발버둥치는가? 매순간 페인터와 페인팅의 물적 토대는 서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페인터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이런 불안정한 관계 자체일 것이다. 따라서 페인팅이란, 최소한 1차적으로는, 페인터와 페인팅의 물적 토대가 불안정하게 관계 맺는, (명사가 아닌) 동사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페인팅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스트로크와 터치다.

스트로크와 터치는 말하자면, 같은 것을 시차적으로 본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페인터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물질을 조작하는 행위가 스트로크라면, 터치는 그 행위의 기댓값이자 물질적 결과로서 행위를 촉발하는 원인이다. 즉, 스트로크는 터치를 생산하며, 터치는 스트로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언제나 통약불가능성이 흐른다. 스트로크는 제일 처음 출발부터 터치를 만족시킬 수 없다. 완벽한 터치란 존재하는가? 의도와 효과, 원인과 결과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그런 세계 말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페인터는 단 하나의 터치만으로도 부족함 없는 경지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성취를 이룬 페인터라면 더 이상 또 다른 페인팅을 제작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며,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추가적인 의미를 두기는 힘들다. 이미 그는 거기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그 장소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말은 곧 페인팅, 나아가 페인터의 죽음을 뜻한다. 그 때문에 이우환은 터치의 정수를 추구했음에도 망설였고, 이내 그것의 무수한 변종을 만들었다. 표면과 서포트를 극단적으로 강조했던 구미의 1950-60년대 페인터도 텅 빈 캔버스를 내 놓을 만큼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는 내가 알기론 없다. 페인터와 페인팅은 모두 죽음에 강하게 이끌리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은 페인터와 페인팅은 모두 살아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때문에 스트로크는 터치를 부르고 터치는 스트로크를 부르고 하나의 페인팅은 기어코 다른 페인팅을 불러낸다. 항상 스트로크와 터치는 항상 기대와 실망이라는 양가감정을 한꺼번에 분출하며, 그런 한, 스트로크와 터치는 무한한 결핍의 생산지이기도 하지만, 꼭 그만큼 미래로 가능성을 열어 둔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동사로서의 페인팅이다. 페인팅은 완성되어 완전히 정지한 사물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스트로크를 끊임없이 욕망하고 유발하는 터치의 집합이다. 이 우글대는 터치는 실로 살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페인터가 또 다른 스트로크를 결심하게끔 만드는 몹시 유혹적이면서도 괴로운 원천이다. 이 말은 우리가 끊임없이 페인팅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페인팅에 고정된 역할을 부여하는 프로젝트—예를 들어 상품이나 정치 이데올로기를 부여하는 일—는 종국엔 실패할 것이다. 거듭 그래서 그런 이데올로기 때문에 페인팅을 두려워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더욱 없어 보인다. 페인팅은 인간과 사물이 몹시 내밀하고 진지하고 지속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이며, 내가 보기에, 그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미술 행위는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도 흔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페인팅이 맞을 이유는 없지만 굳이 아닐 이유는 더욱 없다. 그보다 주의를 기울여볼만한 문제는 이런 것 같다. 오늘날의 페인팅은 무엇을 원하는가...?

2018. 9. 27.

2018년 9월 21일 금요일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미술가. 미술가가 되고 싶은 디자이너

여전히 나는 지금의 추상 붐이 미술보다는 그래픽디자인으로부터 왔다고 믿는다. 그래서 기대를 걸 수 있는 건 그래픽디자인을 흉내내는 미술보단 그래픽디자이너의 미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미술가와 그래픽디자이너를 프로페셔널이란 의미에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 생활이 상당부분 그렇게 돌아가고는 있지만...

2018년 9월 20일 목요일

여전히 무서운 아이들에 관한 반응 중에서

이 전시의 제목에 심기불편해 하는 젊은 세대가 있는 것 같다. X세대 같은 노땅이 스스로를 아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역함 같은 것. 내가 예전에 <청춘과 잉여>라는 타이틀을 달고 몇몇 작가에게 들어야 했던 비난과 유사하다. '잉여라더니 전시에 잉여가 없네?' 같은. 순진하다고 해야하나? 전시 제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혹은 관심이 없는 건가? 전시 제목을 전시와 연관시켜 이해하려는 시도가 없다는 점에서. 혹은 어떤 위기감의 발로일까? 가진 재산이란 젊음 하나인데 그것 마저 남들이 가져가면 나는 어떻게 해? 같은.

여하튼 파편으로 전체를 사고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파편에 고착되는 건 아마 그것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럴 거다. 그러니까 파편이지만 그들에겐 그게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문제가 세상 모든 문제와 일치하게 되는 세카이물에서 작동하는 매커니즘. 이것이야말로 오이디푸스 전단계로의 퇴행 아닌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건 90년대 감성이다. 

이런 말꼬리 잡아서 비난하기는 단문 위주로 돌아가는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의 "의미있는 형식"과 잘 맞아 보인다. 150자 내외의 세계에서 파편은 완전해 보일 수도 있다.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좆문가가 많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형식적 제약이 내용의 불완전함을 완전하게 보이게 만든다.

150자 내외의 사고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이들이 어떻게 말 할까? 내 경험에 따르면 이들은 침묵을 지켰고 반대로 상대방이 말이 많다면 그는 꼰대로 인식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침묵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라면? 예를 들면 인터뷰 같은. 최근의 경험에 따르면, 그냥 자신의 이야기, 대부분은 논리보다는 어떤 느낌을 이야기 한다는 인상인데, 그게 보통의 경험치이거나 그 이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에겐 몹시 특별하다. 

2018년 9월 11일 화요일

http://www.critic-al.org/2018/09/11/redemption/

아서 단토를 읽은 것 같긴 한데 똥구멍으로 읽었나.

여튼 이양헌의 생각하는 습관과 그것이 표출되는 매너, 그리고 그것이 젊은 예술가에게 호응을 얻는다는 점은 꽤나 흥미롭다.

먼저 이양헌은 담론의 통시적인 조망을 즐긴다. 정확하겐 긴 시간의 흐름 속 지금까지 예술의 탄생과 소멸을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마지막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열중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볼 수 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문체 속에서, 근거는 없지만 꽤나 단정적으로 그렇게 한다.

이양헌이 보는 역사적 틀이 어떤지는 따져봐야하고, 그냥 보기에도 엉성해 보이지만, 어쨌거나, 그런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 보자면, 작가에 대한 글쓰기에서 이런 문체는 이 작가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시도, 역사의 인식틀을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고 때로는 혁명적인 일이기도 하다. 때문에 나는 이양헌이 이 젊은 작가를 그런 혁명의 대표주자로서 기꺼이 인정하고 또 거기에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궁금하다. 내가 보기엔, 작가를 경유해 혁명적인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기 보다는, 혁명적인(?) 역사를 경유해 작가에게 신화를 덧붙이는 결과다.

한편 이런 글을 선호하는 작가의 멘털리티도 몹시 궁금하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도 없지만, 사변적으로 전개되는 문체의 느낌, 그것의 결과로서의 역사적 정당성으로 오케이인 것 같다. 그러니까 각론의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증명은 별로 필요가 없으며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런 글의 선호는 힙스터의 소비행태를 안 떠올릴 수가 없다. 힙스터에게 중요한 것은 상품의 생산 과정이 아니라 생산의 끝에서 도출되는 상품-이미지이며, 그 이미지가 자신과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다. 물론 이때 상품-이미지는 뭔가 진정성의 외양을 띄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자신을 포함(혹은 타자화된 자신을 포함), 다른 준거집단이 판단해줄 때 역으로 신빙성을 얻는다. 이런 결과론적인 정당성, 타자에 의해 만족되어진 자기-이미지는 이양헌의 글에서 미리 서술된 역사적 정당성과 공명한다.

미술사를 페티시로 만드는 담론 생산자와 그 페티시를 소비함으로써 미술사를 만들어 가는 소비자. 그리고 미술사와 상관 없이 '청년'을 지원하면 그걸로 만족하는 공공기금 사이의 공모. 이를 통해, 과도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청년 미술사-소비-시장이 열릴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아직까진 미술사의 깊이(?)를 뚫고 들어가지는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표면'에서 이들 관계는 성립해 있으며, 그럭저럭 가시성을 획득해 나는 과정에서 이는 요긴하다.

만약 여기에 본격적으로 미술사-제도가 가담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미술사-제도라고 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미 부분적으로 역사화된 유수 대안공간이며, 뮤지엄일 것이고, 공인된 미술상이고, 마지막은 아카데미다. 만약 이런 본격적인 제도가 가담한다면, 표면은 깊이까지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소지는 다분한데, 제도는, 마치 자본주의가 그렇듯, 항상 새롭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며, 새로움을 주창하는 거의 모든 것들은 제도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미술사-제도가 모두 엉성한 식민주의로 점철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광범위한 공모는 모든 진보에게 해로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