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인제 여행에서 신지승을 만났다. 몇 가지 메모.
1. 마을영화 제작법
영화를 만들면서 마을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 이건 마을사람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해서 인심을 잃어버리면 마을영화 자체를 찍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의 개입은 필요충분조건일 수밖에 없다. 마을에 이벤트가 있다면 감독은 쏜살같이 달려가 양해를 구하고 약간의 구성을 가미해 시퀀스를 만든다.
2. 작은 마음
신지승은 참 작은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은 것 큰 것 가리지 않고 분노도 잘 하고 상처도 잘 받는다. 너무 깨알 같은데 그게 영화에서잘 나타난다. 되게 그 깨알 같음이 의미없어 보이는데 그렇다고 홍상수식 ‘아무말 대잔치’가 아니라, 뭐랄까 아이고 모르겠다. 암튼 웃기지도 않고 어떤 의도도 있어 보이지 않는 그냥 무심한 일상이 거기에 있다. 극강의 클리셰? 대충 딱딱한 똥은 그래도 괜찮은데 휴지에 묻어 있는 똥이나 어디 발라져 짓이겨져 있는 똥은 너무 더러워서 못참는..? 아이고 모르겠다. 표현이 안 된다. 그것보단 미술적 표현이 낫겠다. 뒤샹은 레디메이드란 개념에 만족하지 않고 레디메이드 에이드란 개념도 만들고 여러가지 만들었다. 그 후예 중 조지 브레히트는 lamp event란 작업을 위해 레디메이드-액션이란 걸 했다. 레디메이드-액션은 조지 마키우나스가 한 말이다. 아무튼 일상에서 늘상 하는 행동을 레디메이드로 가져와서 그냥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허무한 작업이다. 이렇게 내가 레퍼런스로 뭔갈 가져와서 신지승의 이미지가 있어보일지도 모르겠는데, 진짜 아무 의미없어 보인다. 일상을 너무 무심하게 대충 찍었달까. 그냥 그대로 가져왔달까. 이 지점에서 좀 토할 것 같달까, 왜? 그게 너무나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클리셰 중의 클리셰여서? 아무튼 그런 느낌을 받았다. 신지승이 여기서 감독의 시대는 갔다라고 했다. (때때로 모순적임) 신지승의 로망은 아마도 마을의 삶이 그대로 영화가 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하는 건 영화적 삶이다. 그게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지점. 아무튼 신지승은 왜 그렇게 클리셰를 가지고 오느냐 그건 작은 마음과 통한다고 본다.
3. 극영화
신지승의 자부심은 마을사람들과 극영화를 찍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진지한 영화라는 거다. 자신은 감독이다. 영화감독. 이런 식의 작업에서 이런 프레이밍은 보기 드문 것이다. 보통 감독은 낮은 자세로 감독이란 위치성에 대해 의식하며, 마을사람들을 우쭈쭈 해주는 분위기 속에서 작업을 해나간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그렇다. 소셜프랙티스로 가면 너무 다양해서 이건 전통적 장르적 규정이 와해되는 분위기다. 그런데 신지승은 완고하게 극영화를 추구하는 영화감독이다. 등장인물은 마을사람이지만 연기를 한다. 그게 자신인지 타인인지 모르는 경계에서. 감독은 내 위대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이들을 진지한 배우로 본다. 영화인들이 보기에 신지승은 진지한 영화 감독이 아니다. 당연히 등장 인물도 배우로 보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어떤 종류의 포인트가 있어 보인다. +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러시아 연극에 관한 대목 참조할 것.
4. 마을의 영화관
대부도 주민의 꿈은 현대미술가가 뭐 패총으로 뭘 하고 비닐봉다리를 하늘에 날려보고 그런 게 아니라 내 자식이 안산에 가서 늦게까지 CGV에서 영화보고 버스 끊겨서 돌아오지 못해 차로 데려와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대부도에도 영화관 하나 만들어지는 거다. 신지승이 마을에 영화관을 튼다는 건 약간 이런 맥락이 있다.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다. 신지승은 조그만 마을에서 자신이 하는 방식으로 국제영화제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좆까라 비싼 상어영화 우리는 더 좋은 영화를 싸게 많이 볼 수 있다는 거다. 지금 인제에서 신지승의 삶을 보면 이건 자신의 처지가 반영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지승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과, 대부도 주민이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좀 겹치는 지점이 있다.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생각 나면 다시 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