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일 목요일

모뉴먼탈

"어떤 것에 모뉴멘탈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생각컨데 그것은 소재라기보다는 내적인 비전, 정신적인 그 무엇이다. 그것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세로 10cm, 가로 8cm 정도의 세잔느의 작품도 모뉴멘털리티를 지니고 있다." - 헨리 무어 (홍사성, 세계조각사1, 1993, 광성문화사, 398쪽)

공공미술, 예컨대 <슈즈트리>가 '흉물'이란 소리를 들으며 대중의 원성을 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의미도 없고 예쁘지도 않다. 개념과 미학 둘 다 결여. un-memorialable하고 un-monumental한 object의 공동체적 기각... 기억과 기념 ... 아이덴티티-공동체와 역사

개인적으론 언모뉴먼탈한 작업이 좋다...근데 시대가 좀 더 필요로 하는 건 모뉴먼탈한 무엇 같아 보인다.

2023년 5월 31일 수요일

David Joselit: Painting Alterity

1. 피카소, <아비뇽 처녀>
2. 로버트 코스캇, <


피카소 <아비뇽 아가씨들>은 멀리서 두 가지 영감 최소한 2개

1. Grebo Mask 아프리카. --멀리 떨어진 공간
cultural alterity. 
remote in space, ethnicity, culture norm

2. 고대 Iberian Stone Bust 스페인쪽 이브 알랭부아. -- 가까이에 있지만 시간이 멈
인트라유럽. but remote in time

alterity(바뀌는 성질)
첫번째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spatial alterity 문화적 거리

두번째는 temporal alterity 이건 공간적인 것의 반대
2번째 고대 아이베리안 조각이 예. 피카소는 루브르에서 봤음. <- 미술사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니지만 중요

하나 시간 얼터리티는 유럽 안에 있지만 시간적으로 거리가 멀고(고대 이베리안 유산)
두번째 공간 얼터리티는 제국주의 심장 파리와 아프리카 식민지 사이

-- 앵그르, <터키탕> (1862) <아비뇽> 비교

목욕자의 타입. 

3. alterity in type
-- <우르비노 비너스> <올랭피아> 비교
누워있는 누드와 유혹하는 창녀 사이에 등호를 만듦. 
유니스 립턴의 해석
티치아노의 비너스. 신부초상. 뒷쪽에서 아이가 뭘 찾고 있음
마네는 고전을 차용했지만 고전적 특징을 강하게 거부함
한편에서 전통적 요소, 그중에서도 그의 리얼리즘의 다이나믹에 중요한 요소를 유지
다른 한편에서 그것이 아나크로니즘이거나 사회적 허위의식을 unmask

흥미로운 건 타입이 적용되고 변형됨
비너스에서 창녀로
모더나이제이션, 디알레고라이제이션

<아비뇽>. 5명의 창녀촌의 창녀를 기반으로 함. 오리지널에선 학생과 선원이 들어오려고 함.

커머셜 현실--사랑의 여신에서 사랑을 돈받고 파는 업자
몸에 대한 생각, 몸에 대한 주목은 무너짐. 진보적인 와해.
스테레오타입을 취해서 도착적으로 거꾸로 만들어버림

이런 해석은 차이의 다이나믹한 경제를 강조하기보다, 창녀 등을 둘러싼 사회 등을 강조.
우리는 바뀜, 다른것의 경제에 주목해야함. 
그건 페인팅에 겹쳐져 있음

3. alterity in type
taking stereotype of painting and reinventing it

조슬릿이 생각하기에 모던아트는 평면성이나 추상, 도심이 근대화되는 것으로 향하는 과정이 아님
3가지 alterity의 타입이 컨버전스 하는 것이 모더니티


--다시

피카소 <아비뇽의 아가씨>(1907) 콜스캇 <알라바마의 아가씨>(1985)
2명의 예술가는 모두 트리플 얼터리티를 만들어내고 있음

템포럴, 컬쳐럴, 스페이셜한 접근은 똑같은 것, 푸코 에피스테메 위에 놓임
the same domain of knowledge

Emanuel Leute,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1851) vs. Robert Colescott, George Washington Carver Crossing the Delaware (1975)

코스캇은 로이츠의 페인팅을 반복. 여기서 로이츠의 페인팅은 일종의 악보. 여기서 전에 있던 걸 가져와서 정확하게 모방해서 재생산하는 appropriation과 악보를 해석하는 건 다르다고 주장. 조슬릿은 전에 걸 가져오는 게 단순한 전유로 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 페인팅의 새로운 퍼포먼스를 위한 악보라고 봐도 된다. 

2. 조지 워싱턴의 유명세와 조지 워싱턴 카버. 
조지워싱턴 카버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농학자. 희소하게도 매우 유명.

미국사에서 두 명 중요한 흑인. 카버. 티 워싱턴. 두명 매우 흑인에게 유명하고 영향력.
그림에서 미국 흑인의 히어로는 코믹하고 비극적인데 이 히어로에는 인종주의 스테레오타입이 포함됨. blackboots aunt Jemima 등등 흑인을 스테레오타입화 하는 도상들..
제마이마 이모는 펠라치오를 하고 있고 어떤 남자는 배후미에서 밴조를 연주

세 가지 얼터리티
1. 로이츠의 그림이 100년 뒤 다시 등장 (시간적 얼터리티)
2. 조지 워싱턴이 조지 워싱턴 카버로 피벗됨 (문화적 얼터리티, 백인->흑인)
3. 대중문화에서 스테레오타입으로 떠도는 형상으로 반복(타입의 얼터리티)

이런 것들이 현대 회화에서 계속 이뤄지고 있음.
모던아트의 연속
1. 모던아트는 형식으로 정의될 수 없음
2. complex, formal, and symbolic negotiation of the triple alterity of history, culture and stereotype

(프렌치 이론) 장치, 프레임워크. 구조적 조건에 기반한 정의

--

1. 시간 얼터리티: 인트라유럽의 견지에서, 피카소의 <아비뇽>은 이베리안 돌조각을 참조했지만 이걸 단순히 원시주의라고 말할 수 없음. 한편 돌조각은 온전한 자신의 용례로 의미화되지 않음: 이것은 서양화 언어의 disruption으로 흡수포섭됨
코스캇에게 얼터리티는 역사적임. 공들여 쓰여진 타이틀에 직접적으로 인용된 것은 역사와 관련된 패러디적 반복
제목이 보여주는 건 시간 얼터리티란 점에서 역사의 의외성과 잔인성에 대한 인트로덕션. American model이란 용어의 저스티스의 모순을 보여줌. 조지 워싱턴은 미국 자긍심의 아이콘. 시간 얼터리티를 통해 그 아이콘이 변해서 인종주의와 백일우월주의의 아이콘이 됨

2. 문화 얼터리티: 피카소는 아프리카 그래보를 이그조틱하게 가져옴. 피카소의 관심은 형식이었고 이걸 취함으로써 기원을 알아야 한다는 책임감obligation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 이건 그러니까 피카소에게 이그조틱한 것이었지 그 이상 특별한 가치를 주지 않았음.
코스캇의 럽쳐는 인트라컬처 안에 있음. 미국내 컬처. 하지만 이건 동시에 인종 럽쳐. 메트로폴리탄 유로피안 센터와 콜로니 사이의 공간적 차이. 미국내 노예제도와 인종주의의 제도와 상관있음.

얼터리티의 타입은 유사성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은 특이점을 가지고 있고 언제나 다르다

3. 얼터리티 인 타입
피카소의 <아비뇽>의 타입은 해체적. 우로비노의 비너스에 비해. 코스캇은 풍자적. 
누드를 그리는 방식how
인종주의 스테레오타입은 더욱 과장되어서 풍자됨

3가지 얼터리티는 모든 모던 웨스턴 페인팅에 다 나타남. 



동시대미술 큐레이터란

큐레이터가 전시를 많이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전시를 주업무로 삼는 직업이 큐레이터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왜냐. 최소한 개인적으론 작가들과 함께 하는 게 점차 지친다. 대부분 불통이 문제이지만 그 심급에는 누가 주도권을 잡는지에 대한 신경전이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작가는 전체상에 손쉽게 접근할 수 없다. 동시대 미술은 일종의 행사가 된지 오래고, 그 행사의 다른 이름은 전시다. 전시에 대한 전체상은 큐레이터가 그린다. 어떤 작업이 전시에 들어오는지부터 어떤 작업이 더 보이고 덜 보이고부터, 어떤 관객을 타케팅하며, 어떤 담론과 연계하고 경합할 것이며, 어떤 사회와 연결할 것이고, 어떻게 예산을 조달하고 분배할 것이며..등등. 이건 작가가 할 수 없다. 왜냐면 작가는 제 작업만이 중요하고 돋보이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작업이 제 작업에 끼치는 손해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게 자신의 고유한 권한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록 전체상에 대한 접근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전시에 임하는 작가가 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내 작업이 돋보여야 한다
2) 내 작업이 돋보이지 않는 상황은 제거되어야 한다

1)에 큐레이터의 도움, 제작 지원, 전시의 흥행 등이 있다.
2)에 큐레이터의 쓸데없는 간섭, 불충분한 제작비 지원, 전시의 불협화음 등이 있다.

일에 협조적인? 작가는 1)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즐긴다. 하지만 좀 더 오쎈틱한 작가라고 해야하나 그런 사람들은 2)에 더 민감하다. 1)과 2)는 동전의 양면이다. 도식적으로 구별하자면, 1)에서는 작가가 을, 2)에서는 작가가 갑이라고 상정된다.

1)의 경우는 별로 문제가 될 게 없다. 작가가 스스로를 을로 받아들이고 변화된 창작의 모드 안에서 활로를 찾기 때문이다. 이 경우 큐레이터나 다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협력할 수록 이익이다. 하지만 2)의 경우, 스스로를 여전히 갑이라고 여기는 경우, 큐레이터와 부딪친다. 내 창작의 권한이 오로지 나에게 귀속된다고 믿을 것이며, 그것을 침해받는 여러 상황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작가-을이 어떤 종류의 협력과 지원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작가-갑은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런 작가는 큐레이터가 그리는 전체상에 훼방을 놓게 될 것이며 서로간 갈등이 시작될 것이다. 큐레이터는 생각한다. 이 작가는 어쩌면 이 전시에 없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큐레이터의 권한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큰 오산이다. 다른 작가-을과의 협력 체계가 몇몇 작가-갑으로 인해 무너진다면, 큐레이터로서 입장이 무척 난처해질 것이다. 큐레이터는 선택해야 한다. 작가-을과 작가-갑 사이에서.

동시대미술 행사를 좋으나 싫으나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작업과 전시와 작가나 큐레이터나 비평가 등등 각자가 상정하는 전통적인 직능이 더 이상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제작이 능력의 연결망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미술계의 작가는 여전히 불굴의 예술혼을 가진 작가이며, 자신이 미술의 현장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대는 많이 바뀌었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사실 원래 없었다. 나는 불굴의 예술혼보다 차라리 업자 같은 마인드를 가진 속물 작가가 좋다. 예술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사람 사는 게 그렇게 별 게 없다. 미안하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권력 관계는 형성되기 마련이고 예술가는 조금 특이한 기술자 나부랭이였고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이었다. 여기서 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내가 큐레이터로서 작가-갑과 주도권 경쟁을 해야 한다면 그건 일이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일이 잘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신념 따위가 아니다. 다른 작가-을에 대한 책임과 연대의식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주도권을 가져간다는 사실 또한 사실이고, 여기에 피치 못하게 억압적인 상황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일이 되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을 못본척 못느끼는척 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상황을 만들기도 싫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하나. 

냉동피자(3)

이후 몇 번 트래지오날레와 레스토란테 두 냉동피자를 몇 번 먹었다. 손님이 와서 꺼내서 먹기도 하고 배가 고파서 먹기도 했다. 실험(?) 당시의 신중함을 견지하기보단 방법만 상기시키며 그때그때 편한 마음(?)으로 구웠다.

사례1: 오일을 먼저 팬에 두르고 예열하기
오일을 먼저 팬에 두르고 최대 온도까지 예열하면 오일이 다 타버린다. 집에 공기청정기 미세먼지 지수가 200넘게 올랐다.

사례2: 물을 많이 적시고 150-180도에서 굽기 시작
도우가 많이 물렁물렁해진다. 그렇다고 탄성이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쫀득하지도 않고 제일 도우 아래쪽 레이어가 그렇게 바삭하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부드럽다고 느낄 수도 있고 아직 다 안 구워졌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례3: 물을 많이 적시고 최대온도 220도에서 굽기 시작
도우 아랫쪽 레이어가 바삭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도우가 딱딱하지 않고 물렁한 부분도 있다. 이게 냉동피자로 뽑아낼 수 있는 최상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만족스럽진 않다. 

2023년 5월 11일 목요일

냉동피자를 향하여(2)

어제 저녁을 피자로 떼웠다. 오트커 박사 레스토란테 모짜렐라 피자 한판을 민하와 함께 먹었다. 마음을 먹었던 대로 피자 바닥을 물로 적시고, 올리브 오일을 팬 바닥과 피자 상판에 뿌렸다. 물론 오븐을 충분히 예열했다. 해동을 시켜라고 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무해동으로 오븐 제일 낮은 랙을 사용해 8분정도를 구웠다. 

결과는..도우가 훨씬 촉촉했다. 쫀득한지는 몰겠다만 부드럽긴 했다. 거기다 맨 아래쪽 얇은 층은 바삭한 느낌도 적당히 있었다. 한국제품에 비해 토마토 소스가 충분히 들어가 있는 것도 특징이었다. 먹었던 냉동피자 중에선 가장 만족스러웠다. 민하도 동의했다. 하지만 일말의 쫀득함을 살리진 못했다. 

야식으로 한 번 남아 있는 고메 토마토소스 피자 한 조각을 같은 방법으로 데워봤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고 좀 건빵 같은 식감이 있었다. 굽는 방법보다 도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기본 피지컬을 후천적인 노력으로 극복하기가 힘들달까..ㅠ

오트커 제품 중 트레디지오날레란 제품이 있는데 도우가 좀 다른 것 같다. 시금치 피자를 주문했는데 후기를 보니 화덕 피자 같은 쫀득함이 있다고 했다. 

트레디지오날레 제품이 오면 같은 방법으로 재시도해봐야겠다.

2023년 5월 9일 화요일

더 나은 냉동피자를 향하여(1)

세윤씨가 소개해준 네이버 동네쇼핑?을 둘러보다가 엉뚱하게 냉동피자 핫딜에 유혹당해 6판을 샀다. 천체 2만 얼마에 샀으니 한 판에 3천얼마. 되게 싸게 주고 샀다.

하지만 이번 구매가 충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냉동피자를 맛있게 데우는 방법을 알아내고 싶었다. 피자는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아니고, 사실 한 조각만 먹으면 물리는데 비해서 너무 과하다. 피자의 토핑이 아무리 화려해도 나에겐 그맛이 그맛이었다. 하지만 많이 기다려야 하고..먹고나면 쓰레기도 많이 남고.. 하지만 그럼에도 피자가 가끔씩 먹고싶다. 그래서 그냥 피자스러운 맛정도를 그때 해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싸고 바로 해 먹을 수 있는 냉동피자가 좋은 선택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막상 냉동피자를 좀 데워먹다보니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먼저 토핑이 적다. 근데 토핑은 뭐 그냥저냥 별로 신경쓰지 않는 타입인데, 치즈를 그렇게 많이 끼얹어서 먹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적응했다. 다만 언젠가부터 도우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냉동피자가 맛이 없는 이유는 토핑의 양이 적기 때문이 아니다. 도우가 맛이 없다.

냉동피자 도우가 건빵과 비슷한 맛이 난다. 무언가 경직되어서, 안에 공기층과 수분이 없이 퍼석하거나 아니면 딱딱하다. 피자도우는 겉바속쫀이 되어야 한다. 겉바속촉보다 더 힘든 경지인 거 같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1. 오븐을 최대한 데워라

2. 빵을 최대한 해동시켜라

3. 오븐의 가장 아랫쪽 랙을 쓰고 아래 열선만 켜라

4. 올리브오일을 붓으로 발라라

이정도를 가지고 오늘 실험을 해봤다. 빵을 해동시키는 건 무리다. 안녹는다. 오븐은 최대한 예열을 했다. 아래 열선만 가지고선 빨리 데워지지 않기 때문에 위아래 열선을 다 쓰고, 적정 온도에서 위의 열선을 껐다. 220도 정도에 도달했을 때 빠른 스피드로 피자를 집어 넣었다. 서서히 오븐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7-8분이 이상적이란 레딧의 의견을 따라서 체크했지만 개뿔. 치즈가 녹지도 않았다. 다시 윗 열선을 키고 4분정도를 더 두었다. 총 11분정도 데웠다. 아마 윗열선을 처음부터 사용했으면 7분정도에 다 녹았을 것 같다. 아무튼. 그러곤 시식.

확실히 그냥 아무생각없이 데웠을 때보단 나았다. 하지만 여전히 건빵 식감이 있었는데, 도우의 상층부(토핑과 가까운 면)는 대충 촉촉했으나 아래쪽으로 갈 수록 퍼석했다. 단면을 봤더니 절반으로 나눴을 때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위 50퍼센트는 여러 소스가 적셔져 있었으나 아래 50퍼센트는 건빵이었다.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닥쪽 빵부분에 물을 적시는 것일 것 같다. 하지만 그럴 경우 너무 말랑말랑 해질 가능성. 흐느적 거릴 가능성이 있다. 그걸 대비해서 오븐팬에 약간 기름층을 만들어두면 좋을 것 같긴 하다.

다음 번엔 이런 조건에서 실험을 해볼 생각이다.

2023년 5월 8일 월요일

스테판 그리말디, 기념관은 왜 필요한가?

메모리얼과 히스토리얼을 구별해야 한다. 1차 대전 이후는 메모리얼이 지어지지 않았고 기념 조상 같은 것이 많이 지어졌음. 당사자는 밖에 나오길 두려워했음. PTSD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 2차대전 이후 메모리얼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세워졌음. 기억해야하는 당위성, 명분이 있었음. 하지만 이는 역사를 한방향으로만 이해한 결과였음.

정의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임. 누군가는 피해자이기도하고 가해자이기도 함. 기억보다 더 중요한 건 공통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 위에 기념관이 있어야 함. 기억으로부터 역사를 분리해내야 함. 사회는 사회의 역사를 '발전'시켜야 한다. 과거의 역사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역사를 위해서.

+ 이 글은 공공미술이 생략한 부분을 정확히 짚어 줌.

https://www.cultureline.kr/webgear/board_pds/7978/%EA%B8%B0%EB%85%90%EA%B4%80%EC%9D%80%20%EC%99%9C%20%ED%95%84%EC%9A%94%ED%95%9C%EA%B0%80.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