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4일 일요일

김수림, 419혁명의 유산과 궁핍한 시대의 리얼리즘-1960-70 백낙청의 비평과 역사의식 (2012) 노트

 시민에서 민중으로

419를 자유민주주의의 요구로 축소시켜 해석하는 것에 백낙청은 반대

백낙청:

"못살겠다 다 갈아엎자" -> 형식적 주권자(법제적 민주주의)가 아닌, 진정한 주권의 요구

민중은 시민의 잠재태; 아직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름

소시민-시민 -> 서구 시민도 곧 바로 시민혁명 후 소시민으로 전락. 시민은 미지. 미완의 인간상

시민혁명의 유산, 불완전하게 실현된 역사, 삶의 근거와 참모습의 망각을 통찰하는 것->리얼리즘

하지만 백낙청은 무언가 실현해야 할 목적이 있었고 온전한 개인의 실현. 그런 진보주의가 리얼리즘을 교체하게 됨

필자: 김수영의 리얼리즘은 목적이 없음. 시궁창이 파라다이스. 

황정아, 소시민문학론과 '근대화' (2017) 노트

1. 근대화라는 키워드
근대적 주체: 개인, 민족, 국민 + 시민
소시민: 시민에 비해 역사적 지명도나 평판에 있어 처지는 느낌, but 한국 근대문학에서 중요

1960년대 시민-소시민 논쟁
1차: 전후세대와 60년대 세대(68문학그룹->문지)의 세대론 논쟁
2차: 소시민문학(김주연)과 시민문학(백낙청)의 대립

근대화를 키워드로 뒀을 때 1960년대 시민-소시민 논쟁은 근대화의 기획은 대부분...
-> 1. 둘다 비슷하다. 2.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로 수렴 3. 다시 이것은 자유주의와 반자유주의의 대결처럼 이해되지만 자본주의란 입장에선 자유주의는 유신의 사생아로 둘을 식별하기 어렵다는 결론

필자: 소시민문학론은 시민문학론과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문학의 근대화가 조국근대화와 동일시 될 수 없음.

2. 소시민과 '내면으로의 선회'
- 소시민 이야기에서는 시민이 전제됨. 시민이 소시민을 비판하지만 소시민도 시민을 (미리) 비판
- 김주연의 용법 소시민은 시민이란 말을 쓰지 않기 위한 선택
- 소시민문학에서는 각자가 자기만의 의식으로 개별화함. 개성적 인간의 현현(김승옥의 <생명연습>) -> 넓게 보면 모더니즘의 내면으로의 선회와 조응. 하지만 아웃사이더로서 사회와 불화하는 모더니즘적 주체가 아니라, 개성적 인간과 같은 긍정의 함의를 가지는 것은 좀 이상함->소시민 개념의 한계. 예) 속물을 인정함. 왜냐 현실이니까. 그래서 긍정.. / 소외란 개념은 원래 근대화의 부작용. 하지만 소외가 발견되자 좋아함. 일반적인 근대화의 부산물이니까. 일단 근대적 의식이 뭐가 됐든 나타나는 게 중요. 이런식. 
- 이 개념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가?
 = 자기 밖의 의지(전근대, 샤머니즘, 인습 등 미개한 현실)로부터 절연하는 내면
 = 그정도로 사회가 미개했기 때문에 쁘띠 부르주아라도 되자. 
- 제임슨에 따르면 내면으로의 선회, 주체성을 중심에 놓는 것은 모더니즘을 설명하는 관습적 방식에 불과함. 사실 자본주의 근대는 탈주체, 탈인격화를 동반. 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작업에서도 주관적인 것의 재현에 대한 금기가 중요한 요소였음. -> 따라서 소시민 문학론은 모더니즘의 관습적 해석에 기댄 주체론. 

3. 트리비얼리즘과 '내면적' 근대화
- 리얼리즘 대신 트리비얼리즘. 사소한 사물의 현상에 하나한 관찰.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
- 트리비얼리즘이 채택되는 건 사소하지 않은 것을 배제하기 위함(큰 이야기, 큰 판, 큰 정치적 구도 등의 배제). 
필자: 사실은 사소하지 않은 것을 사소하게 만드는 기제가 트리비얼리즘. 
사물의 정당한 제 무게를 달아주는 건 소시민의식. 사물을 발견하지만 '평균화'를 거쳐 내면으로 수렴.=> 나르시시즘 cf. 플로베르의 사실주의는 이런 트리비얼리즘과 다름. 무분별하고 원자적인 묘사행위는 나르시시즘을 위한 재료로 '평균화'되는 것이 아니라..자기화나 주관화로 해석하지 말고.. "사실은 선택하지 않는 스타일"(랑시에르)
필자: 사소한 것의 포착, 사물화는 주관화/개성화(트리비얼리즘, 김주연)로 가지 않고 몰개성화 방향도 있다(사실주의, 플로베르, 랑시에르). 그런의미에서 트리비얼리즘은 근대문학을 보는 특정한 이념에 불과.

4. 근대 주체의 전범으로서의 소시민

- 소시민은 시민의 전단계로 상정
- 소시민과 시민은 둘 다 자율적 주체를 상정
- 하지만 소시민은 한계를 가진 주체. 속물적임. 그럼에도 소시민이 주장되는 이유는 샤머니즘 같은 구습에 대적하기 위한 상대적인 위치 설정이 필요했기 때문
- 그 과정에서 사소한 주체의 사소하지 않음(소시민)이 주장되나 사소하지 않은 주체(시민)은 생략되거나 애매해짐


5. 문학의 근대화와 문학의 자율성
- 소시민론이 문학의 자율성을 문학의 근대화와 등치시킴
- 구조주의의 수용과 함께 문학의 자율성 주장이 이뤄져 문학의 자율성이 아무런 의심을 받지 못했음(구조주의는 가장 발전한 과학적 방법론)
- 랑시에르에 따르면 근대성과 자율성의 관계는 정 반대임. 랑시에르에게 미학적 예술체제에서 예술은 예술이 아닌 한에서 예술이라는 근본적인 역설. 예술은 이 체제 내에서 스스로에게 이질적. 자율성은 말하자면 자기 해체성.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의 새로운 연결. 말과 사물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 

6. 소시민문학론과 근대주의
- 소시민 문학론은 근대화를 꾀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근대적 현실과 발본적 대결하고 역사화할 지평을 닫았다는 것이 문제.
- 자율성이 사회비판과 연결되는 서구와 달리 자율성이 사회비판과 절연하는 하나의 태도가 됨. (내부비판으로 멈춤)
- 그런 의미에서 소시민문학론은 모더니즘인 동시에 근대주의(근대추앙)

채희영, 1960년대 소시민 문학 논쟁, 서울시립대 석사학위 논문, 2013, 노트


1960년대 평단: (구세대 vs 전후세대 ) vs 68문학그룹
- 구세대: 문학의 전통 계승 여부를 묻는 전통론, 순수문학론
- 전후세대: 참여문학론
- 68문학그룹: 419세대론 - 개인, 의식, 언어, 구조


68문학그룹은 백낙청이 개입하며 분화 -> 시민문학(백낙청-현실참여) vs 소시민문학(자유주의)

소시민의식(김주연)
<새 세대 문학의 성립> 1960년대 작가를 소시민 의식으로 집약
소시민의식: 문학언어의 특성을 대변하는 새로운 인식으로부터 출발해 현실+역사의식까지 포괄한다고 봄(여기서 현실이나 역사의식은 전후세대의 그것과 차이가 있음. 전후세대는 현실지향성(정치적 태도 같은)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 68문학그룹은 개인내면의 적절한 포착 자체가 역사인식과 동일하다고 봄)-> 트리비얼리즘, 현실에 대한 소극적 태도
소시민 그 자체를 긍정하진 않지만 그런 현실을 인정함->개인의 문제와 함께 지식인 자신의 문제까지 다루고자 함

시민문학론(백낙청)
기본적으론 소시민의식을 비판함
소시민의식=감성적 자아
소시민은 시민계급의 일원이면서 자립자족적인 시민이란 환상에 빠져있음
소시민의식은 시민의식에 다다르기 위한 전단계의 낮은 차원의 의식 수준 
역사의식과 다름, 시민의식과도 더 다름->리얼리즘론

필자: 소시민 의식과 시민의식은 같은 기반 위에 세워진 것임 - 개인
김현이 문학사회학으로 나아가고 백낙청이 문학의 자율성의 중요성을 깨닿는 지점은 상호 보완의 여지가 있다고 보여짐

좌담회
- 언어 관련
서기원: 언어 내부와 언어 외부. 두가지가 있음. 언어는 표현의 수단이다
vs
이청준: 언어 자체가 상황과 내부의식을 포함. 수단이 아님. 
김주연: 현실은 문학작품에서 곧 언어. 수단이 아님.
김현: 언어는 상황과 자아와의 관계

- 역시의식 관련
서기원: 국가나 민족 현실 문제가 제일 우선시되어야 함. 분단현실을 60년대는 전후세대보다 날카롭게 보고 있지 않음. 419혁명이 내포하는 자유주의적 감성만을 취하려는 처사는 비판되어야 함. 

김현: 1960년대 가장 큰 사건, 419는 질적으로 다른 사건으로 문학사적 해석 역시 달라져야 함. 하지만 인식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므로, 문학의 감상주의적 접근, 인간 내면의 가치를 승인하는 것을 치료법으로 삼을 수 있음. 우리 의식의 기초를 내부구조에서 찾지 않고 자꾸 815, 625 같은 외부 트라우마로 돌리는 것은 비판되어야 함. 소시민의식은 자기 상황의 폐쇄성과 한계에 대한 투철한 의식이자 극복 노력임.
김주연: 김현과 대동소이.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시작해보자. 

2023년 6월 1일 목요일

모뉴먼탈

"어떤 것에 모뉴멘탈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생각컨데 그것은 소재라기보다는 내적인 비전, 정신적인 그 무엇이다. 그것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세로 10cm, 가로 8cm 정도의 세잔느의 작품도 모뉴멘털리티를 지니고 있다." - 헨리 무어 (홍사성, 세계조각사1, 1993, 광성문화사, 398쪽)

공공미술, 예컨대 <슈즈트리>가 '흉물'이란 소리를 들으며 대중의 원성을 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의미도 없고 예쁘지도 않다. 개념과 미학 둘 다 결여. un-memorialable하고 un-monumental한 object의 공동체적 기각... 기억과 기념 ... 아이덴티티-공동체와 역사

개인적으론 언모뉴먼탈한 작업이 좋다...근데 시대가 좀 더 필요로 하는 건 모뉴먼탈한 무엇 같아 보인다.

2023년 5월 31일 수요일

David Joselit: Painting Alterity

1. 피카소, <아비뇽 처녀>
2. 로버트 코스캇, <


피카소 <아비뇽 아가씨들>은 멀리서 두 가지 영감 최소한 2개

1. Grebo Mask 아프리카. --멀리 떨어진 공간
cultural alterity. 
remote in space, ethnicity, culture norm

2. 고대 Iberian Stone Bust 스페인쪽 이브 알랭부아. -- 가까이에 있지만 시간이 멈
인트라유럽. but remote in time

alterity(바뀌는 성질)
첫번째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spatial alterity 문화적 거리

두번째는 temporal alterity 이건 공간적인 것의 반대
2번째 고대 아이베리안 조각이 예. 피카소는 루브르에서 봤음. <- 미술사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니지만 중요

하나 시간 얼터리티는 유럽 안에 있지만 시간적으로 거리가 멀고(고대 이베리안 유산)
두번째 공간 얼터리티는 제국주의 심장 파리와 아프리카 식민지 사이

-- 앵그르, <터키탕> (1862) <아비뇽> 비교

목욕자의 타입. 

3. alterity in type
-- <우르비노 비너스> <올랭피아> 비교
누워있는 누드와 유혹하는 창녀 사이에 등호를 만듦. 
유니스 립턴의 해석
티치아노의 비너스. 신부초상. 뒷쪽에서 아이가 뭘 찾고 있음
마네는 고전을 차용했지만 고전적 특징을 강하게 거부함
한편에서 전통적 요소, 그중에서도 그의 리얼리즘의 다이나믹에 중요한 요소를 유지
다른 한편에서 그것이 아나크로니즘이거나 사회적 허위의식을 unmask

흥미로운 건 타입이 적용되고 변형됨
비너스에서 창녀로
모더나이제이션, 디알레고라이제이션

<아비뇽>. 5명의 창녀촌의 창녀를 기반으로 함. 오리지널에선 학생과 선원이 들어오려고 함.

커머셜 현실--사랑의 여신에서 사랑을 돈받고 파는 업자
몸에 대한 생각, 몸에 대한 주목은 무너짐. 진보적인 와해.
스테레오타입을 취해서 도착적으로 거꾸로 만들어버림

이런 해석은 차이의 다이나믹한 경제를 강조하기보다, 창녀 등을 둘러싼 사회 등을 강조.
우리는 바뀜, 다른것의 경제에 주목해야함. 
그건 페인팅에 겹쳐져 있음

3. alterity in type
taking stereotype of painting and reinventing it

조슬릿이 생각하기에 모던아트는 평면성이나 추상, 도심이 근대화되는 것으로 향하는 과정이 아님
3가지 alterity의 타입이 컨버전스 하는 것이 모더니티


--다시

피카소 <아비뇽의 아가씨>(1907) 콜스캇 <알라바마의 아가씨>(1985)
2명의 예술가는 모두 트리플 얼터리티를 만들어내고 있음

템포럴, 컬쳐럴, 스페이셜한 접근은 똑같은 것, 푸코 에피스테메 위에 놓임
the same domain of knowledge

Emanuel Leute,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1851) vs. Robert Colescott, George Washington Carver Crossing the Delaware (1975)

코스캇은 로이츠의 페인팅을 반복. 여기서 로이츠의 페인팅은 일종의 악보. 여기서 전에 있던 걸 가져와서 정확하게 모방해서 재생산하는 appropriation과 악보를 해석하는 건 다르다고 주장. 조슬릿은 전에 걸 가져오는 게 단순한 전유로 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 페인팅의 새로운 퍼포먼스를 위한 악보라고 봐도 된다. 

2. 조지 워싱턴의 유명세와 조지 워싱턴 카버. 
조지워싱턴 카버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농학자. 희소하게도 매우 유명.

미국사에서 두 명 중요한 흑인. 카버. 티 워싱턴. 두명 매우 흑인에게 유명하고 영향력.
그림에서 미국 흑인의 히어로는 코믹하고 비극적인데 이 히어로에는 인종주의 스테레오타입이 포함됨. blackboots aunt Jemima 등등 흑인을 스테레오타입화 하는 도상들..
제마이마 이모는 펠라치오를 하고 있고 어떤 남자는 배후미에서 밴조를 연주

세 가지 얼터리티
1. 로이츠의 그림이 100년 뒤 다시 등장 (시간적 얼터리티)
2. 조지 워싱턴이 조지 워싱턴 카버로 피벗됨 (문화적 얼터리티, 백인->흑인)
3. 대중문화에서 스테레오타입으로 떠도는 형상으로 반복(타입의 얼터리티)

이런 것들이 현대 회화에서 계속 이뤄지고 있음.
모던아트의 연속
1. 모던아트는 형식으로 정의될 수 없음
2. complex, formal, and symbolic negotiation of the triple alterity of history, culture and stereotype

(프렌치 이론) 장치, 프레임워크. 구조적 조건에 기반한 정의

--

1. 시간 얼터리티: 인트라유럽의 견지에서, 피카소의 <아비뇽>은 이베리안 돌조각을 참조했지만 이걸 단순히 원시주의라고 말할 수 없음. 한편 돌조각은 온전한 자신의 용례로 의미화되지 않음: 이것은 서양화 언어의 disruption으로 흡수포섭됨
코스캇에게 얼터리티는 역사적임. 공들여 쓰여진 타이틀에 직접적으로 인용된 것은 역사와 관련된 패러디적 반복
제목이 보여주는 건 시간 얼터리티란 점에서 역사의 의외성과 잔인성에 대한 인트로덕션. American model이란 용어의 저스티스의 모순을 보여줌. 조지 워싱턴은 미국 자긍심의 아이콘. 시간 얼터리티를 통해 그 아이콘이 변해서 인종주의와 백일우월주의의 아이콘이 됨

2. 문화 얼터리티: 피카소는 아프리카 그래보를 이그조틱하게 가져옴. 피카소의 관심은 형식이었고 이걸 취함으로써 기원을 알아야 한다는 책임감obligation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 이건 그러니까 피카소에게 이그조틱한 것이었지 그 이상 특별한 가치를 주지 않았음.
코스캇의 럽쳐는 인트라컬처 안에 있음. 미국내 컬처. 하지만 이건 동시에 인종 럽쳐. 메트로폴리탄 유로피안 센터와 콜로니 사이의 공간적 차이. 미국내 노예제도와 인종주의의 제도와 상관있음.

얼터리티의 타입은 유사성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은 특이점을 가지고 있고 언제나 다르다

3. 얼터리티 인 타입
피카소의 <아비뇽>의 타입은 해체적. 우로비노의 비너스에 비해. 코스캇은 풍자적. 
누드를 그리는 방식how
인종주의 스테레오타입은 더욱 과장되어서 풍자됨

3가지 얼터리티는 모든 모던 웨스턴 페인팅에 다 나타남. 



동시대미술 큐레이터란

큐레이터가 전시를 많이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전시를 주업무로 삼는 직업이 큐레이터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왜냐. 최소한 개인적으론 작가들과 함께 하는 게 점차 지친다. 대부분 불통이 문제이지만 그 심급에는 누가 주도권을 잡는지에 대한 신경전이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작가는 전체상에 손쉽게 접근할 수 없다. 동시대 미술은 일종의 행사가 된지 오래고, 그 행사의 다른 이름은 전시다. 전시에 대한 전체상은 큐레이터가 그린다. 어떤 작업이 전시에 들어오는지부터 어떤 작업이 더 보이고 덜 보이고부터, 어떤 관객을 타케팅하며, 어떤 담론과 연계하고 경합할 것이며, 어떤 사회와 연결할 것이고, 어떻게 예산을 조달하고 분배할 것이며..등등. 이건 작가가 할 수 없다. 왜냐면 작가는 제 작업만이 중요하고 돋보이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작업이 제 작업에 끼치는 손해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게 자신의 고유한 권한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록 전체상에 대한 접근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전시에 임하는 작가가 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내 작업이 돋보여야 한다
2) 내 작업이 돋보이지 않는 상황은 제거되어야 한다

1)에 큐레이터의 도움, 제작 지원, 전시의 흥행 등이 있다.
2)에 큐레이터의 쓸데없는 간섭, 불충분한 제작비 지원, 전시의 불협화음 등이 있다.

일에 협조적인? 작가는 1)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즐긴다. 하지만 좀 더 오쎈틱한 작가라고 해야하나 그런 사람들은 2)에 더 민감하다. 1)과 2)는 동전의 양면이다. 도식적으로 구별하자면, 1)에서는 작가가 을, 2)에서는 작가가 갑이라고 상정된다.

1)의 경우는 별로 문제가 될 게 없다. 작가가 스스로를 을로 받아들이고 변화된 창작의 모드 안에서 활로를 찾기 때문이다. 이 경우 큐레이터나 다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협력할 수록 이익이다. 하지만 2)의 경우, 스스로를 여전히 갑이라고 여기는 경우, 큐레이터와 부딪친다. 내 창작의 권한이 오로지 나에게 귀속된다고 믿을 것이며, 그것을 침해받는 여러 상황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작가-을이 어떤 종류의 협력과 지원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작가-갑은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런 작가는 큐레이터가 그리는 전체상에 훼방을 놓게 될 것이며 서로간 갈등이 시작될 것이다. 큐레이터는 생각한다. 이 작가는 어쩌면 이 전시에 없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큐레이터의 권한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큰 오산이다. 다른 작가-을과의 협력 체계가 몇몇 작가-갑으로 인해 무너진다면, 큐레이터로서 입장이 무척 난처해질 것이다. 큐레이터는 선택해야 한다. 작가-을과 작가-갑 사이에서.

동시대미술 행사를 좋으나 싫으나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작업과 전시와 작가나 큐레이터나 비평가 등등 각자가 상정하는 전통적인 직능이 더 이상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제작이 능력의 연결망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미술계의 작가는 여전히 불굴의 예술혼을 가진 작가이며, 자신이 미술의 현장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대는 많이 바뀌었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사실 원래 없었다. 나는 불굴의 예술혼보다 차라리 업자 같은 마인드를 가진 속물 작가가 좋다. 예술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사람 사는 게 그렇게 별 게 없다. 미안하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권력 관계는 형성되기 마련이고 예술가는 조금 특이한 기술자 나부랭이였고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이었다. 여기서 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내가 큐레이터로서 작가-갑과 주도권 경쟁을 해야 한다면 그건 일이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일이 잘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신념 따위가 아니다. 다른 작가-을에 대한 책임과 연대의식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주도권을 가져간다는 사실 또한 사실이고, 여기에 피치 못하게 억압적인 상황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일이 되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을 못본척 못느끼는척 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상황을 만들기도 싫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하나. 

냉동피자(3)

이후 몇 번 트래지오날레와 레스토란테 두 냉동피자를 몇 번 먹었다. 손님이 와서 꺼내서 먹기도 하고 배가 고파서 먹기도 했다. 실험(?) 당시의 신중함을 견지하기보단 방법만 상기시키며 그때그때 편한 마음(?)으로 구웠다.

사례1: 오일을 먼저 팬에 두르고 예열하기
오일을 먼저 팬에 두르고 최대 온도까지 예열하면 오일이 다 타버린다. 집에 공기청정기 미세먼지 지수가 200넘게 올랐다.

사례2: 물을 많이 적시고 150-180도에서 굽기 시작
도우가 많이 물렁물렁해진다. 그렇다고 탄성이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쫀득하지도 않고 제일 도우 아래쪽 레이어가 그렇게 바삭하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부드럽다고 느낄 수도 있고 아직 다 안 구워졌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례3: 물을 많이 적시고 최대온도 220도에서 굽기 시작
도우 아랫쪽 레이어가 바삭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도우가 딱딱하지 않고 물렁한 부분도 있다. 이게 냉동피자로 뽑아낼 수 있는 최상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만족스럽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