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6일 토요일

진짜 뉴스

언제부턴가 주류 언론이 가짜 뉴스를 검증하려 든다. 여기엔 자신들만이 공신력 있는 진짜 뉴스의 진앙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매체가 진실만을 보도하는가? JTBC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들은 모두 진실을 매개한다. 그런 의미에서 매체는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매개된 것을 전달한다. 그 말은 이런 것이다. 엠비씨의 진실은 엠비씨다. JTBC의 진실은 JTBC다. 한겨레의 진실은 한겨레다.

그래서 가짜뉴스의 검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디어리터러시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진실의 한계는 개인의 미디어리터러시의 한계다. 충분한가? 그렇다면 개개인의 미디어리터러시가 아이템의 진위를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개인이 그런 공정한 판사의 위치로 간다면 거기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모두가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판에 또 하나의 "진짜"를 추가하는 것?

2018년 10월 4일 목요일

tragic-comedy

백남준이 자신의 퍼포먼스를 일컬어 자주 쓰는 말이다. 백남준은 샬럿 무어맨과 1966년 곤돌라 해프닝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기습적으로 벌였다. 무어맨은 이때 스코어를 따라 베니스 운하의 오염된 물에 뛰어 들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발진티푸스에 걸렸다고 한다. 그들은 돈이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유레일 패스 1등석 대합실에서 하룻밤을 지샜다고 하는데, 그걸 두고 백남준은 tragic-comedy라고 했다. 비스바덴 갤러리 22에서 플럭서스 창립 공연도 백남준은 희비극이라고 불렀는데, 매키우너스가 계획했던 것이 잘 풀리지 않았던 상황을 회상하며 그렇게 불렀다.

그러니까 희비극보다 더 적절한 한국말은 웃프다인 것 같다. 웃프다...

오늘의 인용: 비판은 과정을 해명하거나 풍부하게 하거나 완성할 필요가 없다.

"It's not that the work speaks best for itself, but that it always speaks with us--no matter who we are. Criticism doesn't need to explicate, enrich, or complete the process."

from Patricia Mellencamp, "The Old and the New: Nam June Paik," Art Journal, Vol. 54, No. 4, Video Art (Winter, 1995), p. 43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조영남부터 조덕배까지

예외적인 예술가가 아니라면, 예술계는 예술가의 업장이다. 대다수의 덜 야심찬 예술가는 업장의 관례를 위반하지 않고, 따른다. 

그런데 예술계라는 업장의 관례는 사회적 룰과 매우 다르며, 때로는 예술계 내에선 이미 안정화되고 식상한 것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사회에서는 여전히 낯설고, 따라서 불화를 일으킬 가능성을 가진 것도 있다. 다만 아직 표면화되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 않을 뿐이다. 덜 야심차고 순진한 예술가가 만약 어떠한 계기로 그 지점에, 그러니까 표면에 도달한다면, 바로 오늘날의 사태가 벌어진다. 분명히 하던대로 했는데 몰매를 맞고 매장당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갓 예술가의 탓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예술계가 고립되고 사회와 동떨어진 자기 논리를 수십년간 계발하고 정당화시켜온 결과, 조영남과 조덕배는 필연적이다. 순진하게 룰을 열심히 따랐다는 것을 잘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문제의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거듭 말하자면 이들은 야심차고 예외적인 예술가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룰을 바꾸지 못하고 따른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그렇듯이. 생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학습한 것이다. 왜 사회는 그것을 예술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가? 왜 예술계는 여기에 침묵하거나 동조하는가?

비유하자면 예술계는 썩어 빠진 부실기업이지만 관심망 밖에서 예외적 혜택을 받고 있었다. 정말 비판받아야 할 것은 이런 예술계를 만들고 정당화했던 모든 것이다. 특정 인물일 수도 있고 기관일 수도 있고 제도일 수도 있고 담론일 수도 있고 그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근본적인 비판을 통해 예술계가 사회와 협상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몇 놈 잡아 족치고 봉합하는 제스처에 만족할 것이다. 그건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방위적인 재조정이 필요하다.

탈진실적 상황에 대해

지금 누군가가 '오늘날은 탈진실적 상황이 되어 버렸어'라고 한다면 얼마나 이 말에 비판적 효과를 바랄 수 있을까. 거의 없다고 본다. 이유는 저 말이 진실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진실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탈진실이란 것은 진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진실이 세계의 작동 원리로 드러나 버린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과학과 정치가 역사적인 시행착오를 거쳐서 알아낸 진리이기도 하다.

심지어 진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더라도, 탈진실을 비판하는 사람조차 이미 탈진실적 상황 안에 들어와 있다. 비판은 발화 즉시 탈진실의 상대성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크리틱만 그것을 모른다. 자신은 탈진실의 외부에서 탈진실이라는 말꾸러미를 직시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고 착각한다. 발화의 변형을 무시하는 걸까? 혹은 무서워하는 걸까?

어쨌든 그렇다면, 진실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야기가 어떤 (상대적인) 진실을 발생시키는지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은 서로 다른 진실의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진실의 역학 관계를 살핀다는 뜻이다. 만약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실이 절실하다면, 이야기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지원군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한 진실은 또 다른 진실과 똑같은 방식으로 연합하거나 그것에 반하는 종류의 진실과 대립해야 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이야기하는 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런 종류의 매커니즘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해하기로, 다른 말로 그것은, 정태적인 정치가 아니라 정치하기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황교익과 국뽕

황교익이 비판하는 국뽕은 황이 민족주의자가 아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에 국뽕이 심기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불고기를 통해 황교익이 말하고자 하는 건 불고기가 야끼니쿠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보다, 불고기는 우리 뿌리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가깝다.

음모 다큐멘터리에 관해

http://dockingmagazine.com/contents/11/70/?bk=main

서동진이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음모론은 진리를 담지하거나, 최소한 가리켜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편집증적이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단편들로 편집된 시스템은 내재적으로 총체적이며, 혹은 총체적으로 보이는 세계의 표상을 해체하며, 그런만큼 연속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회를 향한 비판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편집증은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망상의 널뛰기를 한다. 그 망상이야말로 진정한 총체성의 계기이자 가짜 총체성 비판의 계기다. 그러니까 서동진에게 음모론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요는, 음모론이 그런 총체적 시스템을 상상/망상하지 못할 때, 그럼으로써 가짜 총체적 시스템을 비판하지 못할 때, 나쁜 것이 되거나 실패한 것이 된다.

여기서 서동진이 당연히 옳고 상상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총체성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삶의 양식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리얼리티다. 자본주의 리얼리티는 과학적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사실은 우연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비과학적이며, 사실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반면 음모론은 편집증적 판타지 같지만, 총체적 인과관계를 편집증적으로나마 붙잡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과학, 이를테면 메타-과학이다. 서동진은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과학적 사고방식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회) 과학적 태도를 요청하고 있다. 음모론 따위를 일부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런 면에서 짓궂은 수사학에 불과하다.

요는, 서동진은 탈진실 상황에서 여전히 그것이 편집증적이더라도 진실-추구-태도를 주문한다. 서동진이 정의한 음모론은 그런 이론적 태도다. <그날 바다>는 음모론을 주창하는 것 같지만 각론에 매달려 그것을 전체인 것처럼 과장한다는 점에서 서동진이 보기에는 우연론에 기반한 실패작이다. 그러니까 서동진이 <그날 바다>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음모론적 출발은 좋았으나, 방법이 너무 자본주의적이어서 실패했다. 통계를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는 것. 그러니까 이론의 실패다. <그날 바다>가 어떻게 프로그램 됐다면 서동진의 마음에 들었을까? 세월호 속의 경제 논리를 파고 들어 자본주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폭로했으면 좀 달랐을까? 정치적인 것이 되는 것일까? 그래서 코뮤니스트 사회를 만들자고 우겼으면 좀 속이 풀렸을까?

내가 보기에 서동진은 예술 작업 '안'에서 가짜 총체성의 폭로와 새로운 총체성의 계기를 동시에 상상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견고한 모더니스트다. 예술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탈진실"로 치부하며 그것이 이데올로기, 즉 허위의식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 소모적인 상황을 서동진은 "내전"이라고 부른다. "내전" 안에서 <그날 바다>는 전쟁을 종식시키지 못하면서 오히려 악화시키는 헛된 몸짓이다. 그래서 참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반면에 예술은 세계로부터의 도피처로 요청된다.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해야 하는 무언가가 된다.

나는 이 문제가 좌파 미술의 전형적인 문제. 내용은 진보적인데 형식은 보수적인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형식의 문제를 작품 자체의 문제로 한정할 수 없다. 이것은 사실 서동진이 음모론을 정의했을 때, 즉 세계를 편집증적 시스템으로 재구성하려는 충동으로 보았을 때 은근 내비쳤지만 거기서 그쳐버린 소견이다. 그 아이디어를 다시 회수해 작품 내부의 문제로 축소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계 속에 그 시스템을 포개 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탈진실적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할지라도, 그 '악화'를 예술가가 지레 겁먹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작업의 미래는 작업 스스로가 결정할 테니까 말이다.

음모론적인 작품 보다는 세계의 음모론화가 어쩌면 필요하다. 내전을 종식시키거나 예술로부터 피안의 계시를 바라기보다는, 무엇보다 먼저, 지금이, 내전 상황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예술은 거기서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할 수도 있으며, 그것이 비판적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상상력을 동원하는 데 있어, 적군의 무기를 이용했을 때 더욱 효과적이라면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이것이 나에게는 진리의 계기를 예술 안에 찾고 그로부터 관객이 각성하기를 기다리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아 보이는 방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