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일 화요일

음모 다큐멘터리에 관해

http://dockingmagazine.com/contents/11/70/?bk=main

서동진이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음모론은 진리를 담지하거나, 최소한 가리켜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편집증적이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단편들로 편집된 시스템은 내재적으로 총체적이며, 혹은 총체적으로 보이는 세계의 표상을 해체하며, 그런만큼 연속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회를 향한 비판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편집증은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망상의 널뛰기를 한다. 그 망상이야말로 진정한 총체성의 계기이자 가짜 총체성 비판의 계기다. 그러니까 서동진에게 음모론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요는, 음모론이 그런 총체적 시스템을 상상/망상하지 못할 때, 그럼으로써 가짜 총체적 시스템을 비판하지 못할 때, 나쁜 것이 되거나 실패한 것이 된다.

여기서 서동진이 당연히 옳고 상상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총체성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삶의 양식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리얼리티다. 자본주의 리얼리티는 과학적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사실은 우연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비과학적이며, 사실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반면 음모론은 편집증적 판타지 같지만, 총체적 인과관계를 편집증적으로나마 붙잡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과학, 이를테면 메타-과학이다. 서동진은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과학적 사고방식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회) 과학적 태도를 요청하고 있다. 음모론 따위를 일부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런 면에서 짓궂은 수사학에 불과하다.

요는, 서동진은 탈진실 상황에서 여전히 그것이 편집증적이더라도 진실-추구-태도를 주문한다. 서동진이 정의한 음모론은 그런 이론적 태도다. <그날 바다>는 음모론을 주창하는 것 같지만 각론에 매달려 그것을 전체인 것처럼 과장한다는 점에서 서동진이 보기에는 우연론에 기반한 실패작이다. 그러니까 서동진이 <그날 바다>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음모론적 출발은 좋았으나, 방법이 너무 자본주의적이어서 실패했다. 통계를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는 것. 그러니까 이론의 실패다. <그날 바다>가 어떻게 프로그램 됐다면 서동진의 마음에 들었을까? 세월호 속의 경제 논리를 파고 들어 자본주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폭로했으면 좀 달랐을까? 정치적인 것이 되는 것일까? 그래서 코뮤니스트 사회를 만들자고 우겼으면 좀 속이 풀렸을까?

내가 보기에 서동진은 예술 작업 '안'에서 가짜 총체성의 폭로와 새로운 총체성의 계기를 동시에 상상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견고한 모더니스트다. 예술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탈진실"로 치부하며 그것이 이데올로기, 즉 허위의식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 소모적인 상황을 서동진은 "내전"이라고 부른다. "내전" 안에서 <그날 바다>는 전쟁을 종식시키지 못하면서 오히려 악화시키는 헛된 몸짓이다. 그래서 참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반면에 예술은 세계로부터의 도피처로 요청된다.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해야 하는 무언가가 된다.

나는 이 문제가 좌파 미술의 전형적인 문제. 내용은 진보적인데 형식은 보수적인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형식의 문제를 작품 자체의 문제로 한정할 수 없다. 이것은 사실 서동진이 음모론을 정의했을 때, 즉 세계를 편집증적 시스템으로 재구성하려는 충동으로 보았을 때 은근 내비쳤지만 거기서 그쳐버린 소견이다. 그 아이디어를 다시 회수해 작품 내부의 문제로 축소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계 속에 그 시스템을 포개 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탈진실적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할지라도, 그 '악화'를 예술가가 지레 겁먹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작업의 미래는 작업 스스로가 결정할 테니까 말이다.

음모론적인 작품 보다는 세계의 음모론화가 어쩌면 필요하다. 내전을 종식시키거나 예술로부터 피안의 계시를 바라기보다는, 무엇보다 먼저, 지금이, 내전 상황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예술은 거기서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할 수도 있으며, 그것이 비판적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상상력을 동원하는 데 있어, 적군의 무기를 이용했을 때 더욱 효과적이라면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이것이 나에게는 진리의 계기를 예술 안에 찾고 그로부터 관객이 각성하기를 기다리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아 보이는 방법이다 .

2018년 10월 1일 월요일

미디어시티를 보고나서 전시와 관련한 단상 몇 개

1. 시작과 끝을 가진 영상을 디스플레이하는 획기적인 방법의 고안이 필요하다. 전시장에 굳이 안 들어와도 되는 작업, 그러니까 공간이 필요 없는 작업이 대다수다. 차라리 이런 작업은 시네마 하나 빌려서 시간표 정해놓고 상영하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관객이 작품을 끝까지 안 본다고? 볼 수 있게 만들어 놔야 보지.

2. 비엔날레를 며칠씩이나 보는 관객은 없으므로, 이렇게 규모의 전시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면, 풀 관람이 불가능한 관객을 위해 부분 관람에 관한 몇 가지 가이드가 필요하다. A코스 B코스 만들어서 가이드를 붙이는 것도 방법이다. 그런 면에서 둘레길이 더욱 큐레이토리얼 면에서 섬세한듯.

3. 전시 작품에 공을 쏟는 것 만큼, 전시 작품에 관한 해석(설)을 더욱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이제는 고민해 봐야 한다. 즉, 작가만큼 큐레이팅에도 전시 형식의 혁신이 필요해 보인다.큐레이터는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대신 표현해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면 큐레이터는 전시로 말한다. 그렇다면 작가 품평할 시간에 큐레이터 자신을 향한 반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전시의 미적 형식은 언제부터 답보 상태였을까?

4. 한국의 비엔날레는 확실히 마케팅에 더욱 많은 비중을 두고 예산을 쓸 필요가 있다. 한국 미술계 안에서 보자면, 서울 외에는 포기한 것처럼 보이고, 국제 미술계로 치면 한국 외엔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국 사회로 치면, 서울도 포기한 것 같다. 일개 중국집도 배달하면서 틈틈이 찌라시를 문에 끼워 놓고 가야 팔리는 마당에 한국 비엔날레는 팔리길 포기한, 혹은 거기에 관심이 전혀 없는 물건이다. 전시를 큐레이터와 작가, 기관 셋이서 꽁냥꽁냥 해서 만들고 치우는 걸로 생각하는 건 이제 좀 깨질 때가 되지않았을까.

최민의 트위터에 들어갔다가

이런 저런 보충을 붙였지만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라고. 방법 자체가 목적이라고. 그런데 이런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을 굳이 그렇게 떠벌일 필요가 있나? 거의 모든 "디자이너"가 성공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 방법의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누가 돈을 주며 똥을 금이라고 해라라고 하니 똥을 "어떻게" 금으로 보여줄지 열심히 고민하는 것. 하지만 따옴표 안에 가두어진 디자이너를 해방하는 일에는 정작 "디자이너"는 관심이 없는듯. 왜? "디자이너"로서 현재 자신은 불만 없이 살고 있거든.

2018년 9월 28일 금요일

취작

미대 나와서 작가 하면서 먹고 살 걱정하며 애꿋은 공립미술관에 취작(취직작업)할 생각하지 말고 애초에 공산주의 사회부터 만들고 나서 작가 활동을 하는 게 차라리 빠르려나.

와..

권모란 인물의 트위터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꼭 누구 보는 거 같다... 무슨 자기계발서 작가인 마냥 미술계 젊은이의 생존 수칙을 막 떠벌이고, 포스트미디엄 같이 서양 미술이론에서 발굴했지만 여전히 애매하게 남아 있는 용어를 막 거르지 않고 사용하네?? 또 세대교체가 마치 혁명적인 사건인 것처럼 말하네? 그리고 10년단위 생년을 기준으로 확 묶어서 인구를 동질화시키고 10년 단위로 뭔가 엄청난 질적인 변화가 있는 것처럼 말하네? 와... 이런 사람이 무슨 이유로 마감에 쫒겨서 잠도 설치고 피곤한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와... 90년대생 다윈주의자. 멋지다. 한국미술 발전하겠네!

반이정 평론

몇 번 우연찮게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했지만 사실 잘 모르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글을 보면 그냥 솔직 담백해서 좋다. 자신의 한계 속에서 작품을 해독한 결과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잘 모르겠는 건 잘 모르겠다고 하고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한 결과를 쓰기도 하고.

솔직함의 미덕은 이런 것이다. 어떤 일관된 역사나 이론, 혹은 최소한 경향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전제 하에 비평글을 솔직하게 써 나가는 행위는 일종의 평론가만의 작은 역사를 써 나가는 일과 같다. 이것은 아마 비평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업적 아닐까.

아무튼 그래서 반이정 평론을 제대로 읽으려면 반이정이라는 사람 자체를 알아야 하는 것 같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배경, 장점과 단점, 한계까지도. 평론가가 평론집을 낸다면 아마 서문에는 그런 것을 써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논문 끝나고 나면...

좋든 싫든 올해가 끝나면 논문을 완성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물론 박사도 생각이 있지만 목적지를 결정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일단은 생각 보류. 그렇다면 커리어다.

혼자 집에 지내는 걸 수년간 지속하다보니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을 한다는 게 이제 좀 자신이 없다. 누가 지금의 날 뽑아줄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김밥천국 알바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미술학원도 생각해보고 음식 가게도 생각해보고 재태크에 관한 허황된 망상도 종종 한다. 밥 벌어 먹으려고 미술의 이상을 포기해서 얻을 수 있는 수익 대비 잃을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다른 분야에서 돈을 버는 것이 수익도 높고 마음 편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여튼 이것도 잘 모르겠으니 일단 보류.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이플럭스 저널 같은 플랫폼을 한국에 만들고 싶다. 물론 사업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학자와 평론가와 작가가 이플럭스에 글을 조금씩 게재하고 시간이 흘러 글이 쌓였을 때 하나씩 책으로 나오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고 상식적이라고 생각했다. 좀 캐쥬얼하긴 해도 어쨌거나 나오니까 그게 떠도는 말의 양을 만들어 낸다. 백남준의 말을 빌리자면, "무한한 양은 좋고 나쁨의 질을 없애버릴 수 있다." 왜 한국에서는 그게 되지 않을까? 미술씬이 작아서? 생각이 부족해서? 사람이 없어서? 관심이 없어서? 분명한 것은 보편적 기대치라는 게 현실적으로 낮긴 하다. 어디 라운드테이블 디스커션에 참여하는 패널, 연구 공모 사업에 참여하는 연구자, 잡지에 리뷰를 게재하는 평론가, 큐레이터 등 한국 미술계의 거의 대부분은 욕먹지 않을 어떤 적당한 선을 알고 있다. 그정도 선을 따라서 대부분의 기금이 돌고 행사가 돌고 전시가 돌고 글이 돈다. 아이고... 몇년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