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9일 토요일

구두닦이

인터넷에서 구두 닦는 영상을 봤다. 
나도 어렸을 때 아빠 구두를 닦아 봤다. 
어딘가에서 구두를 닦고 용돈을 받았다는 얘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 용돈을 정기적으로 받지 않았다. 무언가 쓸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에게 돈돈줘 해서 받았다. 그러다보니 무언가 용돈을 얼마 저축하고 모아서 비싼 물건을 산다는 개념도 없었다. 만약 그런 비싼 물건이 갖고 싶을 경우 사달라고 하면 분명히 안된다 돈없다는 소릴 듣는다. 
그러고보면 나는 엄마에게 아빠 월급 들어왔냐고 종종 물어봤던 것 같다. 엄마는 항상 생활비가 없다고 했다. 정확힌 쪼달린다고 했다. 어렸을 때 쪼달린다는 말은 그래서 알고 있었다. 
돈이 어디서 나오고 아빠 월급이 정확히 얼마인지 몰랐던 어린시절. 돈좀줘를 극복해보고자 생각해냈던 아침마다 구두닦이.
갑자기 이건 왜 생각났고 왜 이걸 기록하고 있는진 분명하지 않다. 

2022년 2월 15일 화요일

성공한 풍자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_m.aspx?CNTN_CD=A0002809879&fbclid=IwAR386es8fkaWD0aSO2tCadlnQ_1OpgEPwJ9Ws9KKv6Zpr1jyqRa6qdR3diE

1. 성공한 풍자? 비판의 대상을 정확하게? 아니면 정당하게? 정의롭게? 타격했다? 풍자는 권력을 병신 만들어 헐뜯고 깎아내리고 멸시하고 조롱하고 또 혐오한다. 풍자에 매너를 바란다? 영국식 젠틀한 사카즘? 젠틀한 형식이 또 문제였냐? 비판을 하더라도 기사도스런 예의는 갖춰라? 비판은 하되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라? 표현의 자유를 또 누군가는 들고 나오겠지. 비 표현의 자유야 말로 표현의 자유라는 걸 좀 깨달아야. 

2. 마이클 잭슨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야. 누가 마이클 잭슨이 그런 사람이래? 잭슨은 땅 속에서 억울할만 하다만 문제는 그게 아니지. 내가 어렸을 때 외국은 미국이었다. 잭슨은 그정도 수준의 표상이다. 성형 많이 한 연예인. 성형수술? 누구나 할 수 있지. 나만 하더라도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더 좋아함.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세대가 올라갈 수록 성형수술에 대한 호감도는 떨어지지. 이게 그 사람이나 세대의 잘못일까? 그냥 그런 역사적 조건이었다. 그리고 상존하고 있고 그런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 앞으로는 많이 변할거고 변했고. 안치환이 마이클 잭슨에 대해 몰랐을리 만무하고 같은 뮤지션으로서 존경 안 했겠냐? 바보냐. 그것보다 미국 팝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있을 수 있지. 그건 마이클 잭슨에 대한 존경심과 비판의식과는 다른 층위. 왜 ‘민중가수’ 안치환이 팝의 제왕을 표상으로 삼았을까. 그건 역시 우리 현대사와 분리될 수 없다고.

2022년 1월 28일 금요일

미감

우리 미술관 공식적인 명칭은 모카 부산이다. 부산 모카가 아니라 왜 모카 부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렇다. 아무튼 우리 미술관은 모카를 고유명으로 쓰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모카이브 모카돌이 등 모든 미술관과 관련된 이름에 모카가 붙는다. 내가 정말 신경쓰이는 것 중 하나가 이런 거다.

아카이브실 이름이 모카이브가 되고 미술관 에이아이 로봇 이름이 모카돌이가 되는 것이 아무 상관 없고 미술관이름이 부산이 되는 것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은 업자가 모든 상점 파사드에 led 전구 테두리를 두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괜찮은 건 대다수가 그것에 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도 괜찮다.

어떤 사람에게 그런건 매우 하찮은 일일 것이다. 매우 하찮기 때문에 어찌돼도 상관없는 것이다. 이런 무신경함이 가능한 것은 그 하찮음이 보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자연화된 혐오라고 부른다. 

2022년 1월 22일 토요일

링 메모 하나

비디오의 저주가 노리는 건 비디오의 증식이라고 소설 내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 증식을 세상의 멸망과 등치시켜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이론적으로, 최소한 비디오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면 저주가 풀린다. 그래서 충실히 그런식으로 비디오의 저주를 전달 전달하다보면 결국 죽는 사람은 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단 한사람의 죽음을 위해 다른 모두가 애써야 한다.

90년대 초반에 나온 <링>은 현재 미디어 문화를 매우 잘 선지적으로 포착한 소설인 것 같다. 비디오의

2022년 1월 21일 금요일

배부른 이야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41742?fbclid=IwAR36Mdqy4b2Qutbt8XFAUwH822QyosiWbld5uxxc9GrvH4Ug7cVAU3DJfqo#home


요즘 드는 생각인데, 맛있는 걸 원할 때 먹을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나는 지금 최소 조건이 갖춰져 있다. 뭐든지 원하면 웬만하면 사먹을 수 있다. 못먹는 것도 있다. 아쉽지만 대체물도 있다. 그럭저럭 참을만 하다.

맛있는 걸 배부르게 먹고나면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진다. 향상심이란 게 사라진다. 그건 현재 지금의 불만족을 해결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맛있는 걸 먹고 난 후엔 발전이 없다. 아니 배가 부른만큼 머리가 텅텅 빈다. 퇴보라고 해야 한다.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도 사실은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어한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사실 과거의 배부른 돼지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라고 변명할 수 있다.

헝그리 베스트 5란 농구 만화가 있었다. 슬램덩크가 인기있을 시절, 약간 짝퉁처럼 나온 만화인데, 비슷하게 읽었다. 헝그리 베스트 5란 작명은 슬램덩크의 뼈인 것 같다. 약자가 노력해 강팀을 이겨나간다. 정상에 서기 위해서. 하지만 정상에 서기 전까진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니까 열심히 해야한다.

배가 부르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상태로 충분하기 때문에. 동물들은, 특히 포식자는 포식을 하고 나면 잠을 잔다.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걷는다. 그러다 배고파지면 또 사냥을 한다. 그리고 포식하고 또 잠을 잔다. 동물의 삶이란게 먹고 싸고 자고 뭐 그런 거. 역사 이후의 인간에 대한 설명과 닮았다.

초원에 먹잇감이 당연하게 있을 거란 전제 하에 포식자가 존재할 수 있다. 어딘가 있기 때문에 사냥만 잘 하면 먹을 수 있다. 인간계도 마찬가지의 전제가 있다. 어딘가 먹을게 당연하게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걸 먹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생존의 조건이 어딘가에서, 신이 내린 선물처럼 주어져 있다고 믿는다. 동물은 아마 그런 생각도 없겠지만 어딘가 산양이 있고 얼룩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자도 있고 호랑이도 있다. 그냥 자연조화다. 배부름과 배고픔만 있으면 이 세계에서 살 수 있다.

2022년 1월 20일 목요일

종목토론방

최근 oci 주식을 몇 주 사서 물렸다. 내가 사는 것마다 내리는데 나도 내가 왜 주식을 샀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좀 신경쓰여서 주식 종합토론방에 가보면 별천지다. 저점에 몇억을 박았다는둥 하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9억이라면 3퍼센트만 먹어도 얼마냐. 갑자기 열심히 일해서 돈번다는 생각이 가짢아진다. 그런 세계에서 미술이 뭐가 중요해. 몇분 몇초만에 몇백 몇천이 왔다갔다 하는데. 1년 연봉을 그렇게 버는데. 돈이 그렇게 많아지면 그 돈을 다시 어디에 넣고 분산하고 재투자하고 해서 불리는 게 일이다. 한달 하루에 8시간을 회사에 바쳐서 얻는 고작 몇백만원과 비교가 가능할까.

2022년 1월 18일 화요일

단순함과 뉴미디어

미디어 발달의 초기에서 미디어는 내부 매커니즘은 어떨지 몰라도 실제론 매우 단순하게 작동한다.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예를 들어 아무리 첨단 인공지능 로봇이 두발로 비틀비틀 걷는다고 해도 인간에게 있어 두발로 걷는 것 자체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게 뭐란 말인가? 

또 올드미디어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발달한 활용법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 매체를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 미디어에 들어가는 내용은 모두 다 단순해진다.

조정되는 것은 원래부터 단순해도 되는 것이 이 미디어의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포르노 같이 단순한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 그렇게 단순해도 충분한 것. 오히려 단순할 수록 충분해지는 것. 

아마 포스트-인터넷과 메타버스 담론에, 여기에 추상미술이 효과적으로 여기에 붙는다면,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추상미술이 진일보했다기 보다, 그만큼 단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