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9일 토요일
구두닦이
2022년 2월 15일 화요일
성공한 풍자
1. 성공한 풍자? 비판의 대상을 정확하게? 아니면 정당하게? 정의롭게? 타격했다? 풍자는 권력을 병신 만들어 헐뜯고 깎아내리고 멸시하고 조롱하고 또 혐오한다. 풍자에 매너를 바란다? 영국식 젠틀한 사카즘? 젠틀한 형식이 또 문제였냐? 비판을 하더라도 기사도스런 예의는 갖춰라? 비판은 하되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라? 표현의 자유를 또 누군가는 들고 나오겠지. 비 표현의 자유야 말로 표현의 자유라는 걸 좀 깨달아야.
2. 마이클 잭슨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야. 누가 마이클 잭슨이 그런 사람이래? 잭슨은 땅 속에서 억울할만 하다만 문제는 그게 아니지. 내가 어렸을 때 외국은 미국이었다. 잭슨은 그정도 수준의 표상이다. 성형 많이 한 연예인. 성형수술? 누구나 할 수 있지. 나만 하더라도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더 좋아함.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세대가 올라갈 수록 성형수술에 대한 호감도는 떨어지지. 이게 그 사람이나 세대의 잘못일까? 그냥 그런 역사적 조건이었다. 그리고 상존하고 있고 그런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 앞으로는 많이 변할거고 변했고. 안치환이 마이클 잭슨에 대해 몰랐을리 만무하고 같은 뮤지션으로서 존경 안 했겠냐? 바보냐. 그것보다 미국 팝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있을 수 있지. 그건 마이클 잭슨에 대한 존경심과 비판의식과는 다른 층위. 왜 ‘민중가수’ 안치환이 팝의 제왕을 표상으로 삼았을까. 그건 역시 우리 현대사와 분리될 수 없다고.
2022년 1월 28일 금요일
미감
2022년 1월 22일 토요일
2022년 1월 21일 금요일
배부른 이야기
요즘 드는 생각인데, 맛있는 걸 원할 때 먹을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나는 지금 최소 조건이 갖춰져 있다. 뭐든지 원하면 웬만하면 사먹을 수 있다. 못먹는 것도 있다. 아쉽지만 대체물도 있다. 그럭저럭 참을만 하다.
맛있는 걸 배부르게 먹고나면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진다. 향상심이란 게 사라진다. 그건 현재 지금의 불만족을 해결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맛있는 걸 먹고 난 후엔 발전이 없다. 아니 배가 부른만큼 머리가 텅텅 빈다. 퇴보라고 해야 한다.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도 사실은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어한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사실 과거의 배부른 돼지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라고 변명할 수 있다.
헝그리 베스트 5란 농구 만화가 있었다. 슬램덩크가 인기있을 시절, 약간 짝퉁처럼 나온 만화인데, 비슷하게 읽었다. 헝그리 베스트 5란 작명은 슬램덩크의 뼈인 것 같다. 약자가 노력해 강팀을 이겨나간다. 정상에 서기 위해서. 하지만 정상에 서기 전까진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니까 열심히 해야한다.
배가 부르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상태로 충분하기 때문에. 동물들은, 특히 포식자는 포식을 하고 나면 잠을 잔다.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걷는다. 그러다 배고파지면 또 사냥을 한다. 그리고 포식하고 또 잠을 잔다. 동물의 삶이란게 먹고 싸고 자고 뭐 그런 거. 역사 이후의 인간에 대한 설명과 닮았다.
초원에 먹잇감이 당연하게 있을 거란 전제 하에 포식자가 존재할 수 있다. 어딘가 있기 때문에 사냥만 잘 하면 먹을 수 있다. 인간계도 마찬가지의 전제가 있다. 어딘가 먹을게 당연하게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걸 먹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생존의 조건이 어딘가에서, 신이 내린 선물처럼 주어져 있다고 믿는다. 동물은 아마 그런 생각도 없겠지만 어딘가 산양이 있고 얼룩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자도 있고 호랑이도 있다. 그냥 자연조화다. 배부름과 배고픔만 있으면 이 세계에서 살 수 있다.
2022년 1월 20일 목요일
종목토론방
2022년 1월 18일 화요일
단순함과 뉴미디어
미디어 발달의 초기에서 미디어는 내부 매커니즘은 어떨지 몰라도 실제론 매우 단순하게 작동한다.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예를 들어 아무리 첨단 인공지능 로봇이 두발로 비틀비틀 걷는다고 해도 인간에게 있어 두발로 걷는 것 자체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게 뭐란 말인가?
또 올드미디어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발달한 활용법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 매체를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 미디어에 들어가는 내용은 모두 다 단순해진다.
조정되는 것은 원래부터 단순해도 되는 것이 이 미디어의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포르노 같이 단순한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 그렇게 단순해도 충분한 것. 오히려 단순할 수록 충분해지는 것.
아마 포스트-인터넷과 메타버스 담론에, 여기에 추상미술이 효과적으로 여기에 붙는다면,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추상미술이 진일보했다기 보다, 그만큼 단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